나는 때로 잊히고 싶다 / 최장순

 

“*톡!”

일찌감치 나를 소환하는 소리.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리려 해도 궁금증이 발동한다. 귀가 얇은 게 문제다. 그러려니 나중에 봐도 무방하지만 참을성 없는 손이 먼저 접선을 한다.

 

여러 개의 단체 톡방이 있다. 가입 인원수로 따지면 수백 명이 넘는다. 저마다 한마디씩 꼬리 무는 글들, 손은 재빨라야 하고 동공은 커져야 한다. 그러나 긴박함도 심각성도 없는 가십에 가까운 글을 접할 때의 실망감이라니. 몰라도 될 것을 시시콜콜 알아야만 하는 상황이 버겁다. 단체라는 이름으로 불려간 마당, 탈퇴도 자유롭지 않다. 공연히 봐야 하는 눈치. 이런 작은 일에 휘달리다니, 적잖이 귀찮다.

 

알릴 수단이 입과 편지에 의존했던 시절이 있었다. 할머니의 부고를 동네방네 알린 것도 내 발품이었다. 우물가는 입소문의 진원지였다. 사실보다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만인이 귀를 기울이는 시대는 아니었다. 사리를 분별하는 어른의 지엄한 한마디면 소문은 입을 닫았다. 그러나 끝도 없이 물고 늘어지는 말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 손을 빌려 쉴 줄을 모른다.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소문의 진원지가 수두룩한 현실이 혼란스럽다.

 

뉴스의 진위를 가리는 것도 쉽지 않다. 가짜뉴스는 편을 나누어 대립하게 만든다. 하루에도 몇 건씩 단톡방을 통해 짝퉁뉴스가 불을 켠다. 친한 사이면 모두 내 편이라 생각하는지 끊임없이 ‘긴급’의 꼬리표를 달고 쏟아진다. 때로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거나 자신들을 비판하는 진짜를 가짜라고 매도하고 방어의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새빨간 거짓말을 믿을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가짜를 만들 때는 약간의 사실에 그럴듯한 거짓을 씌워 꾸민다. 아주 진짜 같은 그럴듯함으로 가공된 것. 오로지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 위해 각종 기재를 동원해 순식간에 퍼트린다. 문제는 받아들이는 쪽에서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가려서 볼 시간이 없을 뿐 아니라 바쁜 일상에 비판적 사고를 갖기도 어렵다는 점을 파고드는 것이다.

 

분주한 일상이 더 바빠졌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댓글을 달아주고, 수많은 사람과 소통하지만 한 사람을 깊이 알지 못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과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 자극적인 기사나 깜짝 놀랄 정도로 소리치지 않으면 주목받지 못하는 일상이 된지 오래다. 눈과 귀는 오로지 손안의 전령傳令에게 예민하게 집중되어 있다. 사색과 고요는 사라지고, 디지털이 줄 수 없는 ‘과정’과 ‘기다림’은 도태되어간다. 최전방 군 시절, 수십 리 눈길을 마다하지 않고 한 통의 마음을 우체통에 집어넣던 그 애틋함은 이제 사라졌다. SNS의 촘촘한 그물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디지털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

 

‘세계가 하나로, 하나가 세계로’ 통하는 놀라운 현실을 마치 불통의 세계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준 듯 반겼다. 온라인이 갖는 비대면의 익명성은 유혹적이다. 전통적 관습에 억눌렸던 욕망을 익명이라는 가면을 쓰면 자유롭게 표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은 일종의 페르소나다. 얼굴이나 이름을 감추고도 얼마든지 자신의 욕망을 분출시킬 수 있으니까. 쉽게 마음을 열고, 빠져들고, 확대재생산까지 열을 올리게 되는 이유다.

 

좋든 싫든 디지털 화면을 통해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소란함을 싫어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그 소용돌이로부터 이탈될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조작된 정보로 속을 수 있다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조심하는 눈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면 속에 감추어진 허위를 본 것이다. 문명으로부터의 역습은 사람이 자초한 것, 그것은 해방의 자유로움이 아니라 또 다른 구속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자각이다. 시끄러움 속에서 깨달은 고독이랄까.

 

온갖 소리가 넘쳐나는 일상. 눈빛과 표정, 움직임과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홀로됨과 침묵의 여유도 사라졌다. 같은 편들끼리는 과잉소통을, 다른 편과는 소통결핍이 두드러진다. 다이어트는 시끄러운 소리에도 절실해 보인다. ‘인간을 해방시켜주는 척 하면서 결국에는 종속시키는’여러 도구들. 나를 소환하는 끊임없는 소리로부터 때로 잊히고 싶다. 아니, 숨기고 싶다. 하지만 그럴 자유가 내게 남아있기는 할까.

 

<수필 오디세이. 202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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