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늄 / 김정미

 

 

 

 

“아가야 너는 천사구나”

친정어머니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그 말에 나는 그만 쥐구멍을 찾아 숨고 싶다. 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며느리 몫을 다하지 못한 까닭이다. 어머니는 뇌졸증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하시다. 작년 겨울 화장실에서 넘어지신 이후론 침대에 누워 계신다. 불행은 폭풍처럼 몰려오는 것인지 치매까지 겹쳐 기억 또한 온전하지 않다. 불행중다행인 것은 어머니 기억이 따뜻한 계절 어디쯤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봄 햇살이 환하다. 꽃잎이 봄바람에 잠시 출렁인다. 삶은 마치 강물로 흘러가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길과 같다. 그 길은 몸 안쪽부터 뜨거워지다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 나비날개처럼 가벼워지다 햇살이 되고 시간의 경계를 넘어 空이 된다. 그 삶의 간극 속으로 날아가는 날개 따라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가벼워지는 중이다. 봄바람에 하르르 하르르 제라늄이 베란다에 꽃잎을 떨군다.

꽃을 유난히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아버님은 봄부터 꽃을 키우기 시작했다. 종일 아픈 아내를 화초 다루듯 보듬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안방 유리문을 열면 방안 가득 붉은 꽃들이 핀다. 아버님은 많은 꽃들 중에 왜 제라늄 화분을 갖다 놓으신 걸까.

작년 겨울, 스페인 코르도바 옛 거리를 걷던 시간이 겹쳐졌다. 오밀조밀한 거리와 소박한 건물들 사이로 메스키타 주변을 걷다보면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마주친다. 하얀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유대인 거리 후데리아 골목은 비좁아 마치 미로에 든 느낌이다. 뒤엉켜버린 실타래처럼 어머니의 기억은 종종 길을 잃곤 한다. 한 번 갇히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늪, 어머니는 지금 어떤 시간의 발자국을 찍고 있는 것일까. 하얀 발코니와 벽마다 걸린 다양한 장식 파티오엔 온갖 꽃들이 화분에 걸렸다.

아주 오래전 유대인들은 1492년 카톨릭 왕들의 억압에 그 고장을 떠나게 되었다. 내일 돌아올 줄 알고 집, 현관 열쇠까지 챙겨 간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사암으로 쌓아올린 돌담과 돌계단엔 그들의 아득한 시간이 멈춰있는 듯했다. 어머니의 기억이 꽃으로 다시 필 날을 위해 아버님은 베란다 가득 꽃들을 키우고 있다.

길을 걸을 때마다 건물 벽마다 매달린 토분들. 그 토분 속에 뿌리를 내린 제라늄. 마당을 가질 수 없던 유대인들이 꽃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창가나 베란다에 화분을 매달아 놓고 키우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벽마다 꽃들이 올망졸망한 꽃잎을 피우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햇살과 바람을 먹고 자란 허공의 꽃들. 그 꽃들 속에서 나는 무엇을 읽으려 애썼던 것일까.

어제와 오늘이란 시간의 벽과 벽 사이 어머니는 조금씩 시드는 중이다. 베란다에는 꽃들이 찬란하다. 누구에게나 꽃이던 때가 있다. 그 꽃 같은 시절이 어느 덧 삶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어머니의 붉은 시간들도 시들다 곧, 바람처럼 가벼워 질 것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고 말한 어느 소설가처럼 움켜 쥔 것을 기꺼이 내려놓는 시간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안타까운 일만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어머니에겐 제 몫을 다 하지 못한 자식도 꽃이고 천사다.

나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커피열매를 분쇄기에 갈기 시작한다. 에디오피아 남부지방의 붉은 열매 예가체프 커피 향이 가득하다. 먼 이국까지 깊은 향기를 품고 온 열매는 비로소 그윽해진다. 태양 아래서 온몸으로 견뎌 얻은 몇 그램의 뜨거운 커피향이다. 제라늄도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그리고 먼 이곳까지 왔듯이…. 어머니께서도 아프고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깊은 시간과 만나게 된 것은 아닐까.

어머니가 또 다시 나를 부른다. 거실은 알 수 없는 울림으로 깊숙하다. 한 방울씩 진한 커피 방울을 떨어뜨리는 커피드립 과정이 끝나가고 있다. 커피 방울 떨어지는 소리에 빗소리가 난다. 베란다엔 여전히 제라늄이 붉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잘 자라는 제라늄의 강한 생명력처럼 어머니도 조금만 더 우리 곁에 있어달라고…. 나는 어머니 귓가에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제랴늄 꽃들과 커피 향이 집안에 가득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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