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 류재홍

 

 

녹슨 철문을 민다‘삐거덕’ 된 소리를 낼 뿐 꿈쩍도 않는다팔에 힘을 실어 힘껏 밀자 겨우 비켜선다.

마당에는 풀이 수북하다놀란 잡초들이 수런거리며 일어서는 바람에 안으로 들어가려던 내가 오히려 뒷걸음질이다자기들이 주인인 양 기세가 대단하다아무리 뽑아도 다시 태어나는 질긴 목숨일진대두 달여를 발걸음하지 않았으니 오죽할까.

툇마루는 더욱 가관이다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흙 부스러기를 잔뜩 안고 있다올려다보니 천장 한쪽이 허물어졌다흙덩이 몇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다민망하여 더는 볼 수가 없다모든 게 제멋대로다하기야 훈기도 없는 집에 무슨 낙으로 제 몫을 하려고 들겠나살 비비며 눈 맞춤해야 사랑이든 미움이든 생겨날 게 아닌가.

이들에게도 청춘은 있었다칠 남매가 복닥거리며 살던 때가 절정이었으리라눈물과 웃음이 적당히 버무려진 방은 안온하고 따뜻했다넉넉한 품으로 무엇이든 받아들인 황톳빛 툇마루는 언제나 반들반들 윤이 났다많은 식구에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었지만그 또한 사는 재미라 여기지 않았을까비바람 눈보라에도 끄떡없던 것이 세월의 무게는 어찌할 수 없나 보다.

허망함을 떨쳐내듯 툇마루의 먼지를 쓸어내린다물걸레질까지 하고 나니 그제야 사람 살던 집 같다내친김에 대청 문도 열어젖힌다맵싸한 곰팡내가 코를 찌른다시렁 위의 한지 상자가 누렇게 뜬 얼굴로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다저 상자에 담긴 유과나 강정은 얼마나 맛있는 간식이던가말라비틀어진 모습에 콧날이 시큰거린다뒷문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든다바람도 사람이 그리웠던가.

빠끔히 열린 쪽문에서 뒤란이 어서 오라 한다오늘따라 장독대가 유난히 넓어 보인다그 많던 독은 어디로 가버렸는지오도 가도 못하는 큰독 하나만 우두커니 서 있다정월 대보름날 어머니가 정화수를 올려놓고 빌던 독이다군데군데 금은 갔지만아직도 위엄이 서려 있다그때 어머니는 무엇을 그리도 간절히 바라셨을까제대로 된 효도 한번 못해본 자식의 어리석은 의문이다.

뒤란에는 장독대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장독대 옆 감나무와 아래채 사이에는 긴 나일론 끈이 매여 있었다딸 부잣집답게 그곳에는 늘 비밀스러운 빨래가 펄럭이곤 했다어머니의 매서운 눈 때문에 마당으로 나가지 못한 그것들은때마다 푹푹 삶겨지는 바람에 다른 빨래보다 유난히 반짝거렸다.

하지만 지금 빨랫줄은 어디에도 없다감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매실나무 몇 그루만 있을 뿐이다사라진 것은 다 아름답다고 했던가매번 짜증을 부리며 감당했던 그 빨래들이어느 날 꿈속에서 얼마나 눈부시게 다가오던지그뿐만 아니다흔적만 남아있는 뒷간에 대한 기억은 달콤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풋사랑을 여읜 아픔에 며칠간 끙끙대며 누워 있었다.

“니 참말로 죽을라 카나이게 뭐꼬?

새파랗게 질린 어머니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억지로 일어나 받아든 종이에는을사늑약 후 민영환이 자결하면서 쓴 유서를 개작한 글이 적혀 있었다어느 국사 시간에 공부는 안 하고 낙서를 했던 모양이었다.

다 쓴 공책을 뒷간 휴지로 썼던 때였다볼일을 보시던 어머니는 그걸 읽다 허겁지겁 달려나오셨겠지내색하지 않았지만심상찮은 딸을 걱정하고 계셨음이 분명했다꽁꽁 얼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나는 외톨이가 아니었다제 설움에 겨웠을까어머니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으며 기어이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세월도 나도 나이를 먹었다이제 정말로 유서를 써놓고 죽는다 해도 말려줄 어머니는 계시지 않는다마음도 몸 따라 헐거워지는지첫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터질 것 같던 가슴이 무덤덤해진 지 오래다.

그래서일까요즘 들어 이곳이 자주 그립다적막과 상처뿐인 빈집이지만무기력한 나를 일깨워주는 데 여기만 한 곳은 없을 듯하다곳곳에 스며있는 젊은 날의 흔적은 잊어버린 순수와 사랑을 불러들인다이곳은 나를 곧추세워 주는 원천임이 틀림없다비워져 있지만빈집이 아닌 집나를 생명으로 채우고 저 또한 추억으로 살아나는 공간이다.

내가 이 집을 떠났듯 내 아이들도 하나둘 자리를 옮기고 있다정작 빈집인 나는 무엇으로 내 아이를 붙잡아줄 수 있을는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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