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에 늦깎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연극판을 기웃거리다가 철 지난 포스터처럼 뜯겨서 거리를 떠돌아다닌 뒤의 일이었다. 상처투성이였다. 게다가 친구들은 졸업을 준비할 나이였으니 낙오병이라는 자괴감이 없지 않았다.
'그래도 늦은 건 없어. 낙오한 자만이 볼 수 있는 풍경도 있겠지.'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나의 낙천주의는 경쟁을 외면하는 습관으로부터 온다. 남쪽 바닷가 소도시의 산골마을에 짐을 푼 나는 무엇보다 灣으로 둘러싸인 바다를 교정으로 거느린 캠퍼스가 좋았다. 산등성이에서 내려다보면 섬을 품은 바다를 산들이 어깨를 겯고 호수처럼 아늑하게 품어주고 있었다. 그 바다가 바로 임화의 시 <현해탄>의 바다였다.
바다가 캠퍼스라면 소라와 게들, 말미잘과 교우관계를 맺으며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병들어 남행한 임화처럼 나는 치자향이 좋던 가포와 장지연 열사의 유택이 있던 현동과 덕동 바닷가를 떠돌며 자취생 생활을 하였다. 부러 도시 외곽을 선택해서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하는 불편이 있었지만 불편을 복으로 삼을 줄 아는 은자隱者의 후예라도 된 것처럼 은근한 긍지가 나를 제법 오똑하게 했다.
강의를 마치면 학교에서 야간 수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근로장학생'이라는 좀 멋쩍은 딱지가 붙은 나의 첫 임지는 대학원이 있는 건물이었다. 청소를 하시던 아주머니들이 퇴근을 하고 나면 아주머니들의 쉼터가 초소로 바뀌었다. 책상 하나와 목제 침상 그리고 낡은 갓등이 있는 오두막에서 나는 틈틈이 책을 읽고 습작을 하였다. 혼자서 하는 습작에 진척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의 습작방법이란 그저 더 많은 책을 읽고 좋은 시집을 만나면 필사를 해보는 것뿐이었다. 오른쪽 검지에 펜혹이 생길 때까지 필사를 하다 보면 뻐근해오는 어깨에 말의 근육이 생겨나는 것 같았다. 서로 길이가 다른 투수의 팔처럼 나는 글쓰기 신체로 몸을 바꾸는 변신의 고통을 달게 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의 수더분한 선임들이었던 정문의 수위 아저씨들은 야경주독하는 모습을 대견스럽게 여기셨던지 출근과 동시에 수위실에 틀어박혀 소설책이나 파고 있는 나의 해태를 매번 눈감아주었다. 뜻밖에 내가 근무를 제대로 서나 안 서나 꼬장꼬장한 잣대를 들고 삼엄하게 감시를 한 선임은 따로 있었다. 학교 연못에 터를 잡은 그는 쉴 틈 없이 순찰을 돌았다. 도르래 소리 같기도 하고 마치 녹슨 철문을 열었다 닫을 때 나는 소리처럼 쇳소리가 나는 그의 독특한 허스키 보이스는 진폭이 꽤나 커서 그가 바로 이 대학의 터줏대감임을 능히 알게 하였다. 하긴, 한밤에 조금이라도 수상한 소리가 나면 득달같이 그 요란한 호각을 불며 출동을 하였으니 내 수위 업무와 태반은 그가 본 것이나 다름없다. 가을밤 창문 밖을 온몸으로 하얗게 후레쉬를 비추며 걷는 그를 보면 적이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심지어 깊은 수면에 빠져 있을 때조차 하얗게 깨어 있을 줄 알았다. 경비를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나 해야 할까.
그 경이로운 수위 선임은 거위였다. 노을이 지면 나는 뒤뚱거리는 거위와 함께 저물어가는 교정에 가로등을 켰다. 멀리 섬들에도 접선신호처럼 불이 들어오고 하늘에도 개밥바라기 별이 켜지면 나의 대학도 어느새 점등인의 별이 되었다. 새벽이면 서리에 으슬으슬 입술을 깨물고 떨고 있는 별들에게 이제 질 때가 되었다는 신호로 스위치를 내리기 위해 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그때도 거위는 나와 함께였다. 가로등 스위치 오르내리는 소리를 따라 전체가 회전을 하는 것 같았을 때, 늦깎이 대학시절의 열패도, 실패로 얼룩진 습작기의 낭패와 가난도 조금은 견딜 만한 것으로 바뀌어갔을 것이다.
수위실에서 나는 짬이 날 때면 대학원생 선배들의 구두를 닦았다. 어느 명절 앞날이었다. 고향 내려갈 준비로 다들 어수선할 때, 식사를 마치고 수위실에 들른 같은 과 조교 선배의 깨어진 구두코가 보기 참 딱했다. 상처에 연고라도 바르듯이 코에 까무스름 구두약을 바르기 시작한 것이 마칠 때쯤 해서는 구두 전체가 유리처럼 반짝거렸다. 아마 내게 세탁기술이라도 있었다면 구겨진 옷 주름을 수평선처럼 좍 펴주고 싶었으리라.
그 이후부터 대학원생들의 구두가 수위실을 '구두 병원'으로 만들었다. 소문이 퍼져서 행정실 직원들의 구두까지 순번을 기다리는 일이 일어났다. 생수병을 오려 만든 내 저금통엔 슬며시 놓고 간 지폐들이 모여 한 학기 장학금이 되었다.
어느 날 수위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오가는 길에 가끔씩 부딪치던 행정실 직원이었다. 그는 오래 망설이던 말을 겨우 꺼내듯이 수줍게 점심을 같이 들지 않겠느냐고 했다. 영문을 몰라 하는 내게 그는 몇 년간 지켜보았는데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다고, 동생 같아서 그저 밥을 한 끼 사주고 싶었노라고 했다. 이름도 모르는 사내의 안경 너머에서 오는 그 깊은 눈빛을 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눈빛 속엔 당시 내가 한참 빠져 있던 백석의 <고향>에서 보았던 온기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타향에서 혼자 앓아누워 있던 시인이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고 노래한 의원의 그 온기 말이다. 나 역시 그의 눈빛에서 떠나온 부모와 고향의 흙냄새를 마주하였으리라.
그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을 대접받았다. 그 '밥심'으로 시를 쓰고 책을 만들며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물론, 밤새 습작을 하던 내 대신 순찰을 돌던 그 극성스럽던 거위의 고마움도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