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분이 / 정임표

  

순분이를 처음 본 날의 하늘은 티 없이 맑았다. 철길 옆에는 빨강, 하양, 연분홍 같은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장가리 개울의 징검다리 곁으로는 송사리들이 재바르게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마을대항 청년 배구시합이 장가리 개울건너 지천(支川)초등학교에서 열렸다. 떠꺼머리 친구들 몇이서 형들을 따라 참가했다. 점심도 굶은 채로 오후까지 시합은 계속 되었다. 70년대 초반의 시골 초등학교 근처에는 문방구점조차도 변변한 곳이 없었고, 하나 있는 구멍가게에는 늙은 할머니가 놋쇠 재떨이에다 빈 곰방대를 땅땅 두드리며 풍년초나 새마을 같은 싸구려 담배를 파는 게 고작이었다. 우리 팀은 중도에서 탈락했다. 십리 길을 터덜터덜 걸어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손포(ㅛ발음을 못해 사람들은 표를 포로 불렀다)가 자기 고모 집에 가서 점심을 얻어먹고 가자고 하였다. 옛날에는 닷새 만에 서는 시골장터에서 서로들 만나 사돈을 맺었으니 산하나 넘고 강하나 건너면 골골이 친척들이 살고 있었다. 산골오두막에서 나는 저녁연기를 본 후퇴하는 패잔병들 마냥 환호를 지르며 우리는 손포 고모님 댁으로 몰려갔다. 지천역에서 멀지 않은 ‘배겉’이란 작은 마을이었다. 나는 지금도 왜 이 동네 이름이 ‘배겉’인지를 모르겠다.

삽짝을 열고 마당에 들어섰다. 수선한 소리에 작은 방 문이 열리더니 ‘월남치마’를 입은 앳된 아가씨가 나오며 반가운 얼굴을 하였다. 고등학교 1학년 쯤 되어 보였다. 괜한 헛기침을 하며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어른들이 계시지 않으니 밥을 얻어먹기는 글러버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샘으로 가서 물을 길어오더니 작은방 문 앞에 걸린 동솥에다 붓고는 국수를 삶아서 차려 내왔다. 우리는 인사도 없이 상에 둘러앉아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순분이가 끓여준 국수라며 키득거렸다. 그 후 떠꺼머리들은 만날 때마다 순분이 이야기를 하였다. 순분이는 어느새 우리들의 천사가 되어 있었다. 나는 순분이 이야기만 나오면 물동이를 이고 걷던 뒤태가 떠올랐다.

내가 순분이를 두 번째 본 날은 손포하고 둘이서 군 입대 인사를 간 날이었다. 설을 쇠고 바로 입대를 해야 하는 우리는 새해 인사와 입대 인사를 겸하여 배겉까지 세배하러 갔다. 그때만 해도 군에 입대하면 일가친척들을 찾아다니며 작별인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다. 어른들은 장도(壯途)에 오른 젊은이들에게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으라며 돈을 주곤 하였다. 6. 25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경험한 탓에 군에 가는 그 길이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날도 나는 술상을 차려내온 순분이의 뒤태만 보았다.

내가 순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느 추석날이었다. 고향을 찾은 친구를 만나러 손포네 집에 갔다가 마당을 질러 나오는데, 승용차 한 대가 대문 앞에 서더니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이 내렸다. 하마터면 “니, 순분이 아이가?”하는 소리가 튀어 나올 뻔하였다. 곁에는 순분이를 처음 보았을 때의 모습을 닮은 다 큰 계집아이 하나와 나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초로의 아저씨 한 분이 서 있었다. 외할머니도 외삼촌도 돌아가시고 이제는 외숙모만이 남아서 홀로 집을 지키고 있는 외갓집을 찾은 것이었다. 나는 낯선 사람인양 목례만 하고는 손포네 집을 빠져 나왔다. 순분이의 눈빛이 대추나무 끝에 앉은 고추잠자리 날개처럼 하르르 떨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혹여 다음 추석에라도 만나면 국수 얻어먹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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