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전 뽑는 인생 이 종 운
이팔청춘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팔순이 되었다. 특별히 보약이나 몸에 좋다는 별난 음식에 호들갑 떨지 않고도 큰 탈 없이 여기까지 왔으니 인생 본전은 다 뽑은 셈일까.
우리 세 식구는 30여 년 전 이민을 왔다. 월급쟁이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에 우리는 당황했고 적응하느라 힘들었다. 어느 날 아내의 안색이 예전 같지 않고 시들해 보였다. 겁이 났다.
괜찮다고 버티는 아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진찰을 마치고 처방 약까지 받아 든 아내가 머뭇거리며 한마디 했다. “제 남편도 좀 봐주시면…” 덤으로 나의 건강 상태도 봐달라는 거였다. 좀 창피했다. 의사는 군말 없이 내게 청진기를 들이대고는 혈압과 혈당치를 확인했다. 이것저것 문진을 끝내더니 “75세까지 사는 데는 문제없겠어요.” 했다. 아내는 내 수명에 성이 차지 않았는지 “겨우 75세냐?”고 물었다. 그런 아내에게 의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인생 75년이면 본전 다 뽑는 거지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나는, ‘본전 뽑는다.’라는 표현이 의사의 언어로는 좀 어울리지 않다고 느끼면서도 꽤 재치 있는 대꾸로 여겼던 것 같다. 어쩌다 늙는다고 나이 타령하는 친구를 대할 때면 으레 “이봐! 그만큼 살았으면 인생 본전 다 뽑는 거야”라며 그때 그 의사의 말을 흉내 내 핀잔을 주곤 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백 세 인생’이니, ‘구구 팔팔’이니 하는 유행어도 없던 때였다. 그때는 75세라는 나이가 아주 까마득하게 먼 훗날이라고 느껴졌는데. 어느새 팔순에 이르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허탈감도 든다. 일종의 자기 최면에 빠졌거나 바쁘게 사느라 나이 먹는 것조차 잊고 있었나 보다. 그렇다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육체와 마음은 퇴행한다는 체념과 아름답게 꾸며진 사후 세계를 동경하는 신화 속에 머물러 있고 싶지는 않다.
돌아보면 해야 하는 것과 바라는 것 사이에서 의욕만 앞세우다 결국 현실이라는 한 축에만 매달린 지난날이 아쉽다. 아무리 힘들었다 해도 ‘그때 그 상황에서 그 선택은 최선이었어!’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위안이 될 법도 한데 말이다. 대책도 없이 헌신짝 버리듯 직장을 그만둔 젊은 날의 그 불같은 성정(性情)이 새삼 부끄럽다. 그로 인해 노모님에 대한 불효, 형제자매에 대한 소홀함, 생고생을 감수해야 했던 아내와 아들에 대한 마음이 납덩이 되어 아직도 나를 짓누르고 있다.
문득 젊은 시절 직장 관리자 교육 시간에 들었던 독수리 이야기가 떠오른다. 독수리는 새 중에 빠르고 힘센 맹금류로 80세까지 살 수 있지만, 40세가 되면 그 길고 강한 부리와 날카롭던 발톱이 더는 쓸 수 없게 된단다. 그냥 죽느냐, 아니면 고통스러운 ‘본 어게인’(Born again)하느냐를 선택해야만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결국 독수리는 부리와 발톱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바위에 찍어 대고 할퀴느라 피를 철철 흘린다. 새로운 부리와 발톱이 날 때까지 150일 동안 친구 독수리가 갖다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다시 태어난 독수리는 드디어 하늘을 비상하면서 30~40년을 더 살 수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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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어게인’의 고통을 이겨내는 독수리를 꿈꾼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남기고 싶어서일까. 마지막 또 한 차례 올지도 모를 회한을 감내할 자신이 없어서일까. 사람들의 눈총을 받을지도 모를 추한 노욕의 몸부림일까. 그러나 젊어서 이루지 못하여 한(恨)으로 남은 빛나는 졸업장도 받고 박사 학위도 땄다는 노인의 화제는 감동이지 않은가.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꼭 필요한 판단력의 기초가 되는 결정형 지능(Crystallized Intelligence) 만큼은 크게 퇴화하지 않는다고 한다. 늙더라도 어느 정도 판단 지능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게 노화(老化) 학자의 주장이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미국, 일본, 유럽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유목민 같은 삶을 사는 동안 가슴 깊이 보듬고 온 이런저런 체험을 잘 발효 시켜 진솔한 글로 살려내고 싶다. 진실을 추구하는 사색적인 멋있는 글도 쓰고 싶다. 이 나이 들도록 명확히 정리하지 못한 채 숙제로 남은 종교에 관한 생각도 손녀들에게 글로 남기고 싶다. 적어도 착하게 살아 온 사람이 ‘종교적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식의 가르침을 무조건 믿고 따르게 할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존재로부터 실체를 볼 수 있는 번득이는 영감의 글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뿐인가 산속 이름 모를 작은 풀잎의 흔들림에서 그들만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리라.
어쩌면 여행과 골프를 오가는 생활에 발목 잡혀 꿈만 꾸다 실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당장 수필가 협회 회원이 되자. 먹이를 가져다줄 친구 독수리와 어릴 적 호랑이같이 엄한 할아버지의 회초리도 필요하다. 여든 살 독수리 글쓰기 삶이야말로 진정 본전 뽑는 인생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