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언제나 예쁜 구두를 신고 있다. 여름이면 핑크빛 샌들을 신고 봄가을이면 끈으로 매는 단화를 신는다. 겨울이면 벗기 편한 고아 부츠를 고른다. 그녀의 구두는 언제나 새 구두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땅을 밟고 걸어본 적이 없다. 그는 중증 장애인이다. 종합복지관에서 민원업무를 보고 있는 직업여성이다.
누구나 그녀를 보는 순간이면 구두로 시선이 간다. 작은 발에 예쁜 아동화를 신고 있어 눈을 끌기 때문이다. 봉사자들이 체중 30kg 남짓한 그녀를 전동휠체어로 이동할 때면 목 뒤로 손을 받쳐서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어쩌다 구두가 벗겨져서 땅에 굴러가면 내 신발! 하면서 당황스러워한다. 나는 구두를 땅에서 집어 조그만 발에 신겨주면서 혹시 자존감이 손상될까 조심스레 바라본다. 하지만 도리어 환한 표정으로 고맙다고 말한다.
그녀는 실내에서도 항상 구두를 신고 있다. 가느다란 발목에 걸려있는 구두를 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친다. 사람이 구두를 신는 목적은 땅을 디딜 때 발을 보호하고 편리하게 걷기 위한 수단이 아니던가? 그는 자신의 발로 땅 위를 걸을 수가 없는 장애인이다. 그녀에게 구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구두를 생각하면 필리핀의 이멜다를 빼놓을 수가 없다. <미스 필리핀>으로 마르코스 대통령과 결혼하면서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된 이멜다에게는 무려 3000여 켤레의 구두가 있었다고 한다. 사치와 허영으로 말년에는 그 많은 구두를 버리고 허망하게 조국에서 쫓겨났다. 그녀에게 구두는 무슨 의미를 지닐까?
나에게도 남다른 구두 이야기가 있다. 내가 간호학교를 입학할 때는 학업성적도 상위권에 들어야 했지만, 신체검사에서 용모와 키 가 포함되었다.
내 앞 번호 수험생이 마맛자국(곰보)으로 인해 탈락되고 나서 펑펑 울던 모습이 나를 긴장하게 했을까. 나는 내 키가 기준에 미달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고민 끝에 키를 재는 순간 발뒤꿈치를 약간 올리는 편법으로 합격선을 간신히 통과했다. 그 순간 얼마나 얼굴에 진땀이 솟던지. 아마도 그때의 그 키 높이는 내 마음에 빚으로 각인되었나 보다.
나는 직장에 첫 출근을 시작하면서부터 굽 높은 구두만 신어 왔다. 지금처럼 구두 크기가 다양하지 못해서 제화점에서 발에 맞게 맞추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발이 작아서 구두를 신으면 예쁘다는 말은 들었지만, 기성화나 이월상품을 사들일 수 있는 행운은 없었다. 혹 제화점에서 주인이 찾아가지 않은 구두가 발에 맞는 경우에는 계획에 없던 충동구매도 마다하지 않았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하이힐을 신고 출근했다. 버스 안에서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나에게 불편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며 낮은 신을 신으라고 일러준 일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좀 불편하더라도 높은 구두를 벗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느덧 굽 높은 구두가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납작한 구두를 신으면 몸이 뒤로 넘어가는 느낌이 들고, 발바닥이 땅에 붙어서 답답하기도 했다.
어느 날 평소와 같이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길을 가던 중 갑자기 무릎이 힘없이 접히는 바람에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멈춰 서서 다친 곳이 없느냐고 묻는다. 민망해서 빨리 일어나려고 하니 무릎이 아팠다. 근처에 있는 한의원을 찾았다. 의사는 진찰 후 퇴행성관절염이라고 했다. 나는 관절염이라는 말에 당황하며,
“어떻게 하지요? 걸을 수 없게 되나요?”
항의라도 하듯 다그쳤다. 의사는 내 구두를 찬찬히 보더니
“구두가 발을 너무 혹사하는군요. 편안한 신발을 신으세요.”
나는 민망하여 얼굴이 화끈거렸다. 굽 높은 신발이 관절염의 원인이란 말인가. 하긴 내 발바닥 앞쪽에는 단단한 굳은살이 뭉쳐져 있다 높은 구두를 신었을 때 체중이 앞으로 쏠려서 생긴 흔적이다.
K와 이멜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구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K에게 구두가 자존심이라면 이멜다에게는 사치와 권력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나에게 구두는 열등감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