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증서 / 남정언
택배 상자가 부쩍 쌓인다. 택배 물품목록이 주로 스포츠 용품에 집중된다. 자세히 보면 바람막이, 가방, 모자, 바지, 신발 등이다. 도심에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갑갑한데 산속은 잠시나마 마스크를 벗고 호흡할 수 있어 등산을 시작한 사람이 많다는데 그 무리에 딸이 합류하였다. 가까운 황령산과 금정산, 장산을 찾아다녔다. 사람이 몰리는 주말이 아닌 평일 낮을 골라 다니니 조심하라는 부탁 말고는 딱히 할 말은 없다.
딸아이는 운동을 즐긴다. 실내 운동으로 암벽등반을 하다가 요가를 겸한 체형 교정인 피트니스를 재미있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창궐한 전염병에 어쩔 수 없이 운동을 멈추었다. 퇴근한 딸이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한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역병은 인간과의 전투에서 매번 승리하였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터져 나올지 모를 변형 바이러스가 두려워 움직임을 줄이고 몸을 납작 낮춘다.
나들이도 마음대로 못 하는 사람들은 직접 만남을 자제한다. 취미와 운동을 겸할 무엇을 찾고 있다. 딸은 일찍 백신 접종을 끝내고 코로나 시대가 아니라면 굳이 하지 않았을 등산에 정성을 기울인다.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산속에서 지친 마음을 충전하고 자신의 건강을 지키려는 행동 심리를 말릴 수는 없지 않은가.
운동의 역사는 오랜 시기에 걸쳐 이루어져 왔다. 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군사훈련으로 공동체를 지키는 수단으로써 활용되었다. 통제의 수단 또는 저항의 수단으로 운동이 활용되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행하는 운동의 의미가 집단적인 것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 데는 현대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개인주의 개성주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녀노소가 가리지 않고 등산에 집중하여 인기를 끌게 될 줄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여가 문화가 변하였다. 사람들은 시간적 경제적 여유의 증가와 함께 휴식에 대한 관념이 다양해졌다. 여가를 긍정적으로 보고 자유롭게 즐기는 필수 생활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1970년대 이후 프로 스포츠가 발전하였고 2,000년대에 들어와 직접 참여하는 형태로 바뀌었는데 운동과 놀이문화도 시대와 맞물려 유행을 타고 있다.
“영남알프스 천고지 아홉 봉우리를 완등하면 메달과 완등 인증서를 준대요.”
딸이 하는 말을 예사로 들었다. 그런데 진짜 영남 알프스 아홉 개 산을 오를 준비로 일주일에 한 번 답사를 하러 가거나, 근무 시간이 불리할 땐 한 달에 한 번 등산을 하면서 인증사진을 모으고 있었다.
영남 알프스는 울산, 밀양, 양산, 청도, 경주의 접경지에 형성된 가지산을 중심으로 해발 1천m 이상의 9개 산을 말한다. 수려한 산세와 풍광을 자랑하는 유럽의 알프스와 견줄만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울산 울주군 상북면과 삼남읍, 밀양 산내면과 단장면, 양산 하북면과 원동면, 청도 운문면, 경주 산내면에 걸쳐 여러 지역을 잇는다. 가지산,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 천황산, 재약산, 고헌산의 7개 산과, 운문산, 문복산의 봉우리에 올라 자신의 열정을 표현하고 자기 존재감을 느끼는 시간을 갖는다.
딸은 아침 일찍 산에 오른다. 새벽에 출발하여 사계절 자연 변화를 지켜보는 소소한 재미도 있지만,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고통을 참는 과정이 오히려 큰 감동이라고 한다. 산에 오를 때 철저히 준비하는 습관이 생겨 위치를 검색하고, 왕복 시간을 예측하고, 지도를 보며 근처 시설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안전 대비를 한다. 산악등산용품이 딸의 소비생활 대부분을 차지하여 최고점을 찍었을 때 등산 외 다른 놀이문화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등산을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넉달 전, 딸아이는 울주군, 경주시, 밀양시, 양산시, 청도군이 보낸 ‘영남알프스 완등 인증서’와 ‘메달’을 택배로 받았다. 메달을 걸고 인증서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해당 자격에 적합하다고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서식인 인증서가 참 멋지다. 은근히 부럽기도 하다. 젊은이에게 대유행이 된 등산 문화는 ‘감성’보다 더한 ‘갬성’ 있는 분위기로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장식하고 있다. 아직 인증받지 못한 등산인들은 딸의 계정을 통해 축하 댓글을 읽고 대리 만족한다. 생각해 보니 앞으로 새로운 등산 문화가 생겨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번엔 ‘영남알프스 완등과 10kg 쓰레기 줍기’ 인증이 유행하지 않을까 하고 나름 기대해 본다.
아직 코로나가 종식되지 않았다. 자유적 거리두기나 일상 감시를 유지하며 재난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쓸 것이다. 외부활동을 줄이고 집에서 할 수 있는 대안 문화는 거듭 발전할 것이다. 동시에 사회구성원이 함께하는 세상을 꿈꾸는 욕구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사람들이 대안적 취미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실적으로 헌혈 50회 금장을 받으면 대단한 특혜가 있다거나, 과거 유행했던 복고풍 놀이문화를 찾아내는 수고를 감수하며 유행시킬지는 그 누구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이참에 나도 영남알프스 완등 인증서는 아니더라도 색다른 인증서를 하나 받고 싶다. 역병에도 살아남았다는 거룩한 증명서 ‘완존完存 인증서’가 발급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