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에 떨어진 별똥별 / 구활

 

 

 

자작나무 숲길을 걷는 꿈을 간혹 꾼다. 연전에 강원도 인제 원대리의 눈 내린 자작나무 숲길을 한 바퀴 돌아 본 것이 자작나무와 맺은 인연의 전부일 뿐인데 왜 꿈길에서 그곳을 해매고 다니는 걸까.

꿈에 만나는 숲길은 강원도는 분명 아니었다. 러시아의 자작나무 숲을 배경으로 한 ‘러브 오브 시베리아’(The barber of Siberia)란 영화에 나오는 몇몇 장면과 자작나무 어린 가지인 비흐따(Vihta) 다발로 증기 욕탕 속에서 전신을 두들기는 모습이 복합 동영상으로 편집되어 꿈에 재현된 것이다. 그 중 백미는 뿌옇게 김 서린 사우나 반야(Banya)에서 뛰쳐나와 두꺼운 얼음을 깬 웅덩이에 맨몸으로 풍덩 빠지는 장면을 보고 나면 즐겁지만 그 냉기에 잠을 깨곤 한다.

눈 덮인 시베리아 평원에 눈부신 하얀 맨살을 드러내고 하늘로 쭉쭉 뻗은 자작나무 숲에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가봐야지, 가야지’하고 벼르기만 할뿐 좀처럼 출발의 앞발을 내밀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오기 하나로 버티고 있다. 머잖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도 타보고 바이칼호 옆 자작나무 숲속 열탕 사우나와 냉탕 얼음 웅덩이를 동시에 즐길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고 있다.

요즘도 ‘라라의 테마 뮤직’을 자주 듣는다. 나른한 오후 리피트 키를 누르고 그 음악을 즐기고 난 밤엔 나는 영락없이 러시아의 자작나무 숲으로 달려간다. 영화 ‘의사 지바고’의 여주인공인 라라도 만나고 토냐도 만난다. 1965년 영화를 찍을 당시에는 러시아 현지 촬영이 불가능하여 눈보라치는 설원풍경은 스페인과 핀란드 숲에서 하얀 돌가루를 바람에 날리며 찍었다지만 내 꿈속의 로케이션 현장은 항상 노랗게 물든 러시아의 자작나무 평원이다.

자작나무는 아름답다. 매료되어 넋을 잃을 만큼 매력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흔히 ‘왕 중 왕’이라 부르지만 자작나무는 ‘목(木) 중 목’이다. 일 년 사철 푸르름을 자랑하는 소나무도 아름답지만 여인의 뽀얀 속살 같은 하얀 피부를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자작나무 군락은 훨씬 더 아름답다. 소나무가 이성적이라면 자작나무는 감성적이어서 훨씬 더 에로틱하다.

꿈에서라도 더 자주 자작나무 숲길을 걷고 싶다. 시인 백석은 ‘백화’라는 시에서 ‘산골 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라고 읊은 적이 있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도 ‘세상은 사랑하기에 알맞은 곳/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자작나무 타듯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나도 자작나무 숲속에서 살다 이승을 하직해도 좋으리라.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해 질 무렵 자작나무 잎새들이 노을 속 마지막 잔광에 아롱거리는 모습을 ‘싫카장’ 보아야 한다. 그러다가 이윽고 이마를 마주 대고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서 생애 중에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일들을 되새김질해봐야겠다.

이곳 북방의 무당들은 자작나무를 하늘과 연결하는 통로로 인식했고 기도할 때는 자작나무 장작을 태운 모닥불 연기로 하늘과 소통했다고 한다. 또 시베리아 샤먼들은 자작나무 껍데기를 벗겨 별을 주워 담는 주머니를 만들었으며 머리에 자작나무 가지를 꽂고 자신의 소망을 하늘에 전했다.

바이칼 호수 옆 사냥꾼의 집 쟈임카에서 하룻밤 머물렀으면 좋겠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그곳에서 자작나무 껍질을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피우고 호수 위로 떠오르는 달을 정월 대보름달 보듯 그렇게 봤으면. 바이칼의 보름달은 평소 보다 서너 배쯤 크고 물 위에 비친 한 줄기 달빛이 윤슬로 반짝이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그 모습을 보고 싶다.

모닥불 옆 자작나무 나뭇단에 비스듬히 기대어 이곳 호수에서 잡은 북극 청어를 훈제한 오물(Omul)과 샤슬릭(Shashlik · 고기 꼬치)을 꼬챙이에 끼워 바닷가 모래밭에서 호롱 낙지를 굽듯 그렇게 구워 먹고 싶다. 안주가 좋으면 술이 당기는 법, 사냥꾼 집에서 구해온 보드카를 마시고 모닥불 불빛에 비친 내 얼굴이 붉게 물들도록 근사하게 취해 봤으면.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이 자지러질 때쯤 사냥꾼의 친구인 주술사가 나직한 음성으로 이곳 전설을 자장가처럼 읊조릴 때 나는 반수면 상태로 빠져들 것이다. “먼 조상인 호리도이가 알혼섬에서 사냥을 할 때 백조 세 마리가 호수로 내려와 어여쁜 아가씨로 변하는 것을 보았지요. 사냥꾼은 목욕하는 아가씨들의 날개옷 하나를 감추어 버렸어요.” 시작하는 투가 우리의 ‘나무꾼과 선녀’를 빼다 박은 듯이 닮아있다.

“그 아가씨는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고 사냥꾼의 아내가 되어 열한 명의 자녀를 낳게 되지요. 아내는 날개옷을 한 번만 입어 보게 해 달라고...” 늙은 샤먼의 전설 이야기는 어디에서 끝이 났는지 나는 듣지 못했다. 모닥불이 사위어 가듯 내 영혼도 잠 속으로 사그라져 자작나무 숲속으로 떨어진 별똥별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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