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회상하다 / 정조앤
그날은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로 시작되었다. 1992년 4월 29일 이후 5월 4일까지 수천 명이 LA에서 시위를 일으켰으며, 유혈, 방화로 확산하였다.
1
나는 운전 중이었다. 코리아 라디오방송에서 방금 들어온 긴급 뉴스라면서 아나운서의 격양된 음성이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지금 한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이 폭도들에 의해서 약탈을 당하고 방화로 건물이 불에 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황급히 TV를 켰다. 화면에 비치는 시가지는 데모행렬로 넘쳐나고 전쟁터를 방불할 정도의 경찰과 군 병력이 곳곳에 배치된 모습을 보았다. 화가 났다.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폭도로 변한 주민들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상점들의 유리창을 깨부수고 들어가서 물건들을 약탈하는 장면이 비친다. 이 판국에 저런 저질스러운 행동을 한다는 것이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우리가 사는 토런스에서 15마일 안팎의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라서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가게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전화하여 그곳 할리우드는 안전한지를 물었다.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현재 일어난 심각성을 전혀 알지 못하여 빨리 가게 문을 닫고 서둘러 귀가하라고 당부했다. 남편은 110번 프리웨이를 점령한 시위대를 피해서 하이웨이 1번 남쪽으로 접어들었는데 많은 차량이 한꺼번에 몰리는 교통량에 오도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시위대를 차단하려고 설치한 바리케이드 사이로 간신히 빠져나와서 샛길로 돌고 돌아오다 보니 5시간이 걸렸단다. 밤을 새우며 TV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날이 밝자마자 전화기에 불이 붙었다. 너희 가게는 괜찮은지를 묻는 지인들이 걱정하는 안부가 빗발쳤다. 백인들의 지역으로 분류되는 할리우드 쪽은 군인, 경찰들의 철통같은 방어막으로 시위대가 근접을 못 한다는 뉴스를 들었다. 우리 가게는 폭동에서 비껴갔지만 고마워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2
가발 가게를 하는 친구가 전화를 했다. 온종일 걸려오는 전화에 머리가 멍하다고 한다. 밤사이 가게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동네 불량배들이 가게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창고에 쌓인 물건을 싹 다 가져가지 않았을까, 혹은 건물에 불을 내지 않았을까 걱정하느라 날밤을 새웠다며 울먹인다. 한동네에 사는 친구 내외와 함께 위로차 그 집으로 갔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무슨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 일단 가게 근처까지 가서 동향을 살피자고 했다. 친구는 길가 쪽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불량배들은 보이지 않고 낯익은 동네 주민들이 가끔 보인다며 다소 안심을 하는 눈치이다. 가게 뒷문으로 다가가 차를 세우고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누가 엿볼세라 망을 보면서 미용 재료와 가발 박스를 재빠르게 밴 뒤 칸에 실었다. 친구는 얼마나 긴장했던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우리는 그 와중에도 민첩하게 행동했다. 첩보 영화에서 봄 직한 장면을 연출하지 않았을까. 폭동이 가라앉고 안정세로 접어들 즈음에 친구를 만났다. 건물에 피해가 없었던 이유는 세 들어있던 가게 건물주가 유대인이었단다.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백인이라서 보호를 받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왠지 씁쓸하다.
3
학부모 모임에서 알게 된 P는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 둘을 키우고 있었다. 친정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생활전선에 나섰다. 그녀는 자바시장에서 의류를 싸게 구매하여 주중에는 가까운 곳에서 주말에는 먼 곳으로 이동하여 아웃 도어 스와밋에서 장사를 했다. 눈썰미가 있던 그녀는 히스패닉 구매자들의 취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여러 종류의 옷을 가지런히 진열해 놓으면 손님들이 몰려와서 하루해가 지기도 전에 거의 싹 쓸어 갔단다. 몇 년을 고생스럽게 장사하더니 저소득층 지역 큰 건물에 들어선 인도어 스와밋에 상가를 얻었다. 제법 평수가 넓은 자리에서 여러 종업원을 두고 장사를 하더니 몇 해 지나서 아담한 집을 장만하였다. 오픈 하우스 때 손님 맞는 그녀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종종걸음으로 집안을 돌아다니며 해맑게 웃었다. 2년이 지났을까. 약탈과 방화로 인해 스와밋 건물이 화염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했다. 그 장소는 많은 한인이 월 임대료를 내면서 장사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울부짖던 상인들의 애처로운 모습을 티브이에서 보았다. 연기와 재로 얼룩진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그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 같았다. 그 친구 역시도 여는 상인들과 다를 바 없이 어머니날 대목을 앞두고 인기 품목을 대량 주문으로 받아 놓은 상태였다. 폭동이 지나간 후유증은 매서운 바람이었다. 매달 어김없이 납부해야 할 페이먼트는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즉시 집을 처분하고 월세 아파트로 옮겼다. 그녀는 쓰러지다가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근성을 나는 곁에서 보았다. 두 아이를 훌륭하게 잘 키워서 결혼시키더니 이제는 솔로 시니어 인생을 즐기며 건강하게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4
폭동이 일어나기 2주 전이다. 나는 성경공부하면서 알게 된 K와 용돈벌이 부업으로 무엇을 할까 의논하다가 에그롤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고기, 닭고기 에그롤을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상품을 만들어도 누군가가 주문하고 팔아줘야 하는데 일단은 만들어놓고 발품을 팔자는 식으로 일을 벌였다. 그 와중에 폭동이 났다. 그때 방송국, 신문사, 종교기관에서 생활 터전을 잃고 어려움을 겪는 한인들을 돕자는 취지의 캠페인을 하면서 모금운동을 물론이고 쌀, 식료품, 의류 등을 모으는 장소가 곳곳에 생겨났다. 그때 한인들은 십시일반으로 구제하는 일에 온 마음을 모았다. 우리는 에그롤 열두 개들이 몇십 박스를 아낌없이 후원하는 일에 동참했다.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한 끼의 식량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날로 용돈벌이 부업은 끝났다. 몇 달 뒤 그녀는 월 매상이 좋은 카페테리아를 인수했다.
5
폭동이 일어난 지 십여 년이 지나서 우리는 백인 동네에서 운영하던 주유소를 정리하고 흑인 동네에서 리커 가게를 개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가가기에는 너무 먼 그들이 아니었던가. 은퇴하기 전까지 중국 사람을 빗댄 칭키(Chink)라는 비속어를 날마다 들었다. 못난이들이 내뱉는 말로 치부해 버리고 못 들은 척했지만, 아시안이기에 겪는 인종차별적인 언어폭력이다. 동네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웬만한 일은 웃어넘기고 신경을 곤두세우지 세우지 않았지만, 깊은 유대감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폭동 당시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잘 알고 있는 종업원 A에게 소상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지금의 이 가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주민들이 솔선수범하여 지켜주었단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있었다니 아무튼 고맙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인종차별을 겪는다. 인류가 공존하는 한 영원히 안고 가야 할 숙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