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박진희
천정이 벽을 타고 빙글빙글 흘러내린다. 작은 머리짓에도 식은 땀이 나고 명치 끝에서 울렁이기 시작한다. '으-읍' 입을 틀어막고 겨우 눈을 뜨고 세면기로는 어림도 없을 거 같아 변기로 달린다. 몸의 포물선을 그리자마자 생리현상을 1초도 막을 수 없는 역류. 두뇌 피질에서 미로를 통해 연수로 전달되며 구토 중추를 건드린다. 위와 횡격막 뿐 아니라 복근을 자극하여 식도로 순식간에 역행하며 사정없이 분출된다. 잠을 잘 수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어둠속의 몽롱한 상태. 윗몸의 중간에 위치한 소화기관이 그 안의 불순물을 견디다못해 충격적인 항거를 한다.
이 증세는 처음이 아니다. 수십년간 된통 혼난 적이 손가락을 셀 정도로 기억이 또렷하다. 난 이럴 적마다 마치 죄를 짓고 회개하는 마음처럼 돌이키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입 안에 뭘 쑤셔 넣었던 거야?’ 생선과 조개류에 곁들어진 탄수화물의 화학작용은 거의 최악이었다. 정신적, 시각적, 후각적, 심리적으로 미친 끔찍한 자신의 고문이 아닐 수 없다. 몸에서 거부하는 것은 과연 생각없이 넣어진 물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시껄렁한 기사를 읽거나 별 의미 없는 영상들을 보면서 그 많은 양의 음식을 제대로 씹기나 했을까. 사무실로 쓰는 방에서 부엌으로, 거실이세 뭉그적거리다 침대에서 오래 뒹굴었던 탓이기도 하다. 펜데믹으로 인해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일하며 안이한 생활에 소화가 어려워지고 있다. 위와 창자는 이런 생활에 오래 견디다 못해 두뇌를 자극한다. 그 끔찍한 것들이 내 몸을 탈출하면서 제대로 살라고 몇시간 동안 절규한다.
입으로 먹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엔 지난 세월 놓친 드라마나 영화 보는 것이 꽤 괜찮았다. 그러다 시간이 넘쳐나니 이런저런 세상 얘기에 접하게 되었다. 감옥에서 자살했다고 보도된 제프리 엡스타인이란 금융가의 다큐멘터리는 구역질이 났다. 사실 그는 섹스중독자로 섬까지 소유한 부호였지만 온갖 부정부패가 가득했다. 세계의 정치가들과 재벌들을 초대해 십대 중반의 아름다운 소녀들을 섹스의 노리개로 삼았다. 영국의 앤드류 왕자가 거기에 연류되어 직위가 박탈되었고 빌 게이츠도 엡스타인과 친분이 있어 이혼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대통령 선거가 되면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 진흙탕에서 피 터지게 싸우는 걸 보면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듯하다.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두려울 정도다. 과도한 input에 세상도 사람도 변해간다. 혹시나 잘못된 판단을 하거나 오류를 낳을지도 모르는 넘쳐나는 볼거리에 치어서 꾸역꾸역 살아간다. 눈에서 뇌로 읽히는 일들, 안보면 그만인데 그게 안된다. 머리속에 쑤셔 넣는 정보에 포만감도 못 느끼고 불감증에 익숙해지고 있는게 아닌지.
사르트르의 <구토>에 등장하는 앙투안 로캉탱은 주어진 대로, 의미없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과 교류없이 사는 모습은 지금 우리의 시대를 연상케 한다. 로캉탱은 바다에서 아이들처럼 ‘물수제비 놀이’를 하려고 조약돌을 주워드는 순간 시큼한 구토 증상을 경험한다. ‘문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거울 속에서 자기 얼굴을 바라보면서…’ 시시때때로 불쾌감의 구토를 느낀다. 그는 모든 존재들이 지닌 본래 모습과 마주했을 때 느끼는 낯설고 불편한 감정으로, 그런 생리현상을 동반한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 새로운 각오로 떠난다. ‘반수면상태에 빠져 안주해 사는 편안함을 느끼면, 자기와 자기 아닌 존재들의 본래모습에 주목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인간은 치열하게 노력하며 스스로의 의미를 찾아 나가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그렇게 표현했다.
2년이 넘게 길어지는 칩거생활에 사람들은 본질에서의 자유, 실존이라기 보다는 생존하기에 힘쓴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름 의미를 찾아 열심히 활발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존재의 이유 보다는 맹목적이고 안일하고 둔감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 그러나 거기서 오래 머물 수 없지 않은가. 예전의 예민삼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더라도, 깨어서 사람들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된다고 자책한다. 언젠가 로캉탱처럼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몇 주에 걸쳐 매슥거림이 떠나지 않고 있다. 예민해진 후각에 겨우 몸을 추스러 주위를 청소하면서 생각의 혼란함도 최대한 제거하고 싶다. 실존에 앞서 난 살아가기 위해서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무엇을 만지거나 바라보아도, 누군가와의 대화에도 시큼한 불쾌감이 들지 않기를 바란다. 몸의 포물선을 낮게 그어 한참동안 변기를 내 몸처럼 닦는다.
아름답지도 깨끗하지 않은 내용이라 죄송한 마음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세요!
거쳐가면서 더 나아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