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건물을 돌아 나오는데, 건물 밖 비어있는 넓은 공간 위로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쪼인다. 온몸이 쪼그라들 듯 쪼여지고 가슴엔 금세 뜨거운 열기가 가득 찬다. 방금 전 광고 건으로 만났던 문화부장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요즘 수필이 문학인가요? 알다시피 문학은 아니잖아요. 누구나 다 쓰는데…. 수필문학상을 광고해드려야 신문사 쪽에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게 최종 결정입니다. 이번만 하고 저희는 더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바쁜 듯 움직이는 그의 몸짓에 나는 문학에 대한 일장연설이나 항변 한 번 못하고 자동 유리문을 열고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마음이 착잡했다.
'그래 누구나 쓴다. 인터넷 매체가 발달하면서 그게 더 쉬워졌지. 문화센터 강좌도 한몫을 했던가. 허니 어쩌랴. 문학에 대한 지나친 엄숙함이나 숭고함을 따지던 시각에서 보면 분명 그 질이 떨어졌고 이미지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길을 걷다 만나는 사람들 열명 중 한 명은 시인, 또 한 명은 수필가라는 우스갯말이 생긴 것도 이런 걸 풍자한 농담이겠지. 하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써도 그들 마음속에 문학에 대한 열정과 문학정신이 살아 있다면, 몸에 걸치는 장식쯤으로 생각하거나 자신에 대한 교언영색만 아니라면 그 양이 많은 게 뭐 대수이랴. 어디서나 알곡과 쭉정이는 저절로 갈라 털어질 터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영혼이 수필에 진심으로 닿아 있다면….
문학엔 갑도 없고, 을이나 병도 없다. 그래서 문학이다. 사람과 사람 사는 이야기에 누구나의 구별이나 차별은 있지 않으니까. 학력이나 인맥도 없다. 많이 배웠다고, 사람들을 두루 널리 안다고 잘 써지는 게 아니다. 많은 지식이 창작의 길로 직행하거나 공감이나 감동을 주는 글을 쓸 수 있는 보증수표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공부를 게을리 하면 결국은 창작하는 힘이 점점 사라질 것이다. 누구든지 삶에 대해 깊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진심으로 글을 써 내려가면 될 일이다. '진심眞心이 직설直說이다.
내 자신이 생각해도 애매하고 모호한 답변에 마음에 복잡해진다. 보다 확실하고 단호한 해답은 없는가. 불쑥 차가움이 그리워진다.
올해 2월에 다녀온 니카타의 설국. 일주일 내내 내린 눈으로 하늘길이 닫혔던 니카타는 무슨 이유인지 한 시간만을 여행객들에게 선물처럼 열어주었고, 우리는 터널은 지나지 않았지만 드디어 '눈의 고장'에 도착했다.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세계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곱게 빻은 쌀가루 같았던 눈. 온 세상에 똑같이 내리는 눈인데 그곳의 눈은 왜 그렇게 보송보송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포근하면서도 눈부셨다. 그 눈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흠뻑 맞으며 설국雪国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내 안의 감정들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지금 이 순간, 그 차가운 눈의 촉감을 다시 만져보고 싶어 진다.. 눈 아래 집들이 묻혀 있다. 눈으로 갇힌 방. 머릿속에서 그 방 풍경이 떠나질 않는다. 일본 전통 료칸에 짐을 풀면서 방을 둘러보니 아무것도 없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찻잔이 있는 긴 다탁과 도코노마에 꽃병 하나, 옆에 별관처럼 조그만 방이 딸려 있다. 궁금해서 얼른 열어본다. 조그만 방에 작은 앉은뱅이책상이 앙증맞게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짐도 안 풀고 그 책상 앞에 앉는다. 창밖으로 눈 내린 풍경이 고요하다. 이 방에 갇히면 완전히 미니멀리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선 버려야 한다. 버리고 비워내 가볍고 간단해져야 한다. 이런 책상에는 책을 몇 권 놓아야 어울릴까. 10권, 아니 5권이나 3권으로 줄여야 하려나. 만약 단 1권의 책만 허락된다면 무슨 책을 골라야 하나. 읽을 책이 단지 한 권뿐이라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꼭꼭 잘 씹어서 소화시킬 수 있겠지, 요즈음 볼 책은 많고 바쁘다는 핑계로 자꾸 대충 읽게 되는데….
불현듯 매번 '집중 조명'을 위해 수필가 한 분의 작품을 토론 대상으로 고를 때마다 겪는 고민이 떠오른다. 사실 작고 문인이면서 토론 대상에 오르는 분(순수 수필가 혹은 유명 예술가의 수필)이니 대개 작품집도 다수이고 작품의 양도 많다. 그런데 왜 고민에 빠지냐고? 집중 토론을 해야 할 작품이니 우선은 그 질이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한다. 분명 양은 많은데 이 작품은 이게 좀 부족하고, 저 작품은 저게 모자란다. 뼈다귀(서사나 철학적 사유)만 있고 살(서정)이 없으면 너무 건조해 버석거리고, 뼈다귀가 너무 가늘고 살만 퉁퉁하면 감정이 넘쳐 흐늘거린다. 아니면 그저 잡담이나 주변의 일상사에 그치는 문학성이라곤 거의 없는 글들이다. 작가가 수필 한 편을 쓸 때에는 대충 쓰지 않고 그래도 심혈을 기울여서 썼을 텐데, 그 마음과 정성을 헤아려서라도 좋은 작품을 선정해야 한다는 마음에 어깨가 무거워진다. 적당한 선에서 고르자고 마음을 먹으면서도 늘 뒤가 켕긴다.
아, 대표작으로 고를 게 이리도 없다니…. 우리가 수필을 쓴다지만 제대로 된 작품 하나를 건져 올리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구나. 어디에 내놓아도 괜찮을 완성도 높은 자기의 대표작을 3~4개 정도 갖고 있는 수필가라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런 진지한 생각들을 하다가도 수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실망하게 되는 일이 많다. 그 중의 하나가 문화예술지원금에 관한 이야기이다. 매년 심사대상에 오른 작품집을 살피다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수필가보다는 비 수필가가 수필집이나 에세이집으로 더 많이 지원받기 때문이다. 나도 한 번은 심사위원으로 심사를 하다가 최종에 오른 명단을 보면서 괜히 심통이 났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본격적으로 문학적인 수필을 써 온 사람들의 책보다 그냥 산문의 형태를 빌어서 쓰는 유명인들의 책이 훨씬 잘 뽑혀서야….
이런 상황에서 우리 수필가들이 무얼 해야 하나. 선정된 책 제목을 보면서 우선은 구미가 당기고 자극적인 걸로 해야 할지, 소확행 시대에 어울리는 표지디자인 마케팅을 펼쳐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이제는 우리 수필가들도 확실히 천편일률적이거나 안이한 출판 마케팅은 던져버리고 뭔가 한번쯤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뭐, 많이 팔리는 책이나 지원금을 듬뿍 받았다고 딱히 좋은 책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야말로 누구나 쓰는 '산문散文의 시대'에서 수필이 문학으로 살아남으려면 어쨌든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책 내용이 좋아야 하지만 시대 흐름이나 그 코드를 읽어내는 힘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시대에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극복하는 일이다. 우리 동네에서만 끼리끼리 읽는 것이 아니라 전국이나 번역되어 온 세계 사람들에게 읽힌다면 오죽 좋으랴. 그러면 그 햇볕이 쨍쨍 내리쪼이는 오후, 남에게 그런 몹슬 말을 듣지 않아도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