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막다르긴 주변 마을에 살고 있다. 자동차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꽤 넓은 주차 공간이 있고, 산으로 오를 수 있는 등산로 입구가 하나 나 있다. 막다르긴 하지만 하늘이 툭 트여서인지 폐쇄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거리를 처음 방문한 손님들은 느낌이 좀 다른 것 같다.
얼마 전 한 지인은 '아포리아(Aporia)란 말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 말 원래의 뜻이 '막힌 길'이니 무리 없는 연상이다. 그러나 아포리아는 통로 또는 수단이 없는 것을 의미하니 퇴로조차도 찾기 어렵도록 꽉 막힌 답답한 길이어야 하는 건 아닐까. 차만 돌려 나가면 사통팔달하는 우리 마을에 대한 평가로는 조금 억울하다.
아포리아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을 의미하는데 동일한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두 개의 상반하는 합리적인 의견이 나오는 경우에 느끼게 되는 곤혹스러운 심적 상태를 일컬을 때 사용된다. 소크라테스는 무엇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질문을 통해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밝히도록 만들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자신의 앎과 양립하지 않는 다른 신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했다. 그 깨달음은 곤혹스러운 심적 상태를 초래하여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스스로 철회하도록 만들었다. 즉, 그는 아포리아를 사람들이 지식을 얻도록 만드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플라톤이 저술한 『메논』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하나의 전진이고, 그것으로 겪게 되는 곤혹 즉, 아포리아는 스스로 지知를 추구하기 위해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아포리아를 미리 찾아 제시하는 것으로 여러 가지 연구의 단서로 삼았다. 특히 『형이상학』에서는 실체와 제1원리의 연구를 하는데 아포리아를 앞세웠는데, 그 연구의 학문적 자립성과 기본내용에 관한 아포리아를 제3권 전체를 할당해서 15가지를 열거했다
존재자에 대한 학學으로서 이 연구를 제4권 이후 제15권에 이르도록 수행할 때, 그는 원리의 확보를 논증에 의하지 않고 변증에 의하는 등 독자적인 논점을 제시하여 아포리아를 끌어낸 추론의 전제와 과정에서의 오류를 해소함으로 그 해결을 기도했다.
그러나 칸트에 이르러서는 달라진다. 칸트의 비판 철학에서는 안티노미(Antinomi), 즉, 이율배반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의 아포리아 역할을 한다. 안티노미는 원래 동일한 법전에 있어서 개개의 법률 사이의 모순, 알력을 의미하지만 철학용어로서는 두 개의 서로 모순되는 명제, 즉 정립과 반정립이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주장되는 것을 말한다.
현재로는 패러독스(Paradox)가 이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패러독스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에 반하는 명제를 말한다. 그러나 논리학에서 이 말을 엄밀한 의미로 사용할 때는 증명될 턱이 없는 모순 명제가 타당한 추론에 의하여 혹은 적어도 일견 타당한 추론에 의하여 도출되는 것을 패러독스라고 부른다.
칸트는 그 이성비판에 의하여 이성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려고 했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시도한 것도 그러한 목적에서였다. 그것을 위해 이성이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테마에 직면해서 일견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을 밝혔다. 순수 이성 비판은 인식능력으로서의 이성을, 실천이성비판은 행위능력으로서의 이성을, 판단력비판은 취미 판단 및 목적론적 판단력, 즉 판단 능력으로서의 이성을 비판하고 음미한 것이다. 지금 거론한 비판의 의미를 반영하여 이들 3개의 비판서 모두가 이율배반을 취급하고 있다. 칸트는 이성의 법정이 순수 이성 비판에 있다고 했다. 이성은 근본에 있어서 입법적이다. 이 근저에는 자연법사상이 흐르고 있다.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아포리아 혹은 안티노미 등의 지적 상황을 끌어들여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오랜 세월 노력해 왔다. 그렇다면 날이 갈수록 답답하게 조여 들어오는 이 사회적 상황의 아포리아와 안티노미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차이와 다름'을 배제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그것을 확인하고 수용하는 법을 찾아가는 변증법적 노력이 일상생활에도 조금이나마 적용될 수 있다면 '막다른 길'에서도 '출구'를 발견할 가능성이 생기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