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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울음소리에 잠을 깼다. 희부염한 새벽이 밝아오고 잎새들은 바람에 수런대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못 생긴 나무’가 들어왔다. 아무리 못 생긴 나무라도 족보와 이름은 있을 터인데, 그쪽과는 거리가 멀어 그냥 닉네임처럼 ‘못 생긴 나무’라 불러오고 있다. 녀석은 잡목 치고도 진짜 못 생겼다. 베어버리고 싶지만 50피터가 넘는 꺽다리라 그럴 수도 없어 방임 상탠데 아, 이 녀석 눈만 뜨면 이렇게 먼저 인사를 건네 온다. 주제에, 내가 눈 뜨면 가장 먼저 시선을 던지는 새벽 창 중앙에 나 보아란 듯 버티고 있으니 비껴갈 수가 없다.
하지만, 멀리 있는 님보다 가까이 있는 친구가 더 좋다고 새벽마다 눈을 맞추다 보니 어느 새 정이 들었나 보다. “못 생겨서 미안합니다”하던 이주일이 생각나고 폐암으로 죽어가면서도 금연 운동에 동참했던 그가 떠올라 동일시되면서 일말의 연민도 생겼다. 가끔은 안스러운 마음에 “너는 어쩌면 그렇게도 못 생겼니?”하며 혼잣말처럼 건네기도 한다. 하지만 녀석은 언제나 묵묵부답이다.
그럴 때면 녀석을 대변이라도 하듯, 한 무리의 새떼들이 날아와 원무를 하며 시위를 한다. 그래도 우리가 와서 깃을 치지 않느냐고. 외모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고 떼거리로 재재댄다. 사실은 사실이 아니냐고 때로 항변을 해 보지만 언제나 판정패를 당하는 건 내 쪽이다. 새 떼들의 재재거림 속에도 장자가 있고 실존 철학이 있으니 난들 어쩌랴.
그런데 날씨가 흐려서인지 녀석의 대변자였던 새떼들이 오늘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작은 새’ 한 마리가 가지 끝에 앉아서 고개를 양옆으로 도래질 하고 있었다. 아마도 갈 방향을 가늠하고 있나 보다. 나는 도래질 하고 있는 모습도 귀엽고, 어느 쪽으로 날아갈 건지 궁금하기도 해 고 작은 놈을 지켜보기로 했다. 편안히 누워있던 자세를 바꾸어 창문 쪽을 향해 모로 누웠다.
그 순간이다. ‘작은 새’는 길게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이 가지 끝을 널 구르듯 힘껏 박차더니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달마가 간 동쪽이 아니라 반대 방향인 서쪽을 향해 그 녀석은 사라져 버렸다. 서쪽으로 간 이유를 묻기도 전에 창틀 밖으로 사라진 작은 새 한 마리. 손 안에 꼭 들어올 것만 같이 조막만한 새도 제 몸무게는 지니고 있었는지 빈 가지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남긴 존재의 ‘흔적’은 그 뿐. 그러나 그것도 이내 제 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방금 전 까지도 작은 새가 머물렀던 사각 창틀. 작은 새의 소우주는 비어 있고 그의 흔적이나 존재를 아는 이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창틀 밖으로 사라지고 빈 가지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간 것. 어찌 보면, 차창 밖으로 스쳐가 버린 풍경처럼 사소한 일이요, 쉬이 잊혀질 일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리도 싸한 가슴을 안고 생각에 잠기는가. ‘흔적’ 없이 사라져간 새 한 마리의 ‘부재’가 뭐 그리 대수롭다고. 그런데도 사라진 새 한 마리에 나를 대입해 놓곤 이른 새벽부터 허망함에 빠져 있다. 이 세상에서 그 한 순간을 지켜본 것 역시 나 하나뿐이란 생각이 내 가슴을 더욱 파동치게 한다. 내가 증언해 주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작은 새의 존재와 그 흔적. ‘내 있다 가는 자리도 그러하겠지.’ 이럴 때는 새떼들이라도 날아와 재재거려주면 좋으련만. 오늘따라 하늘은 왜 잿빛이며 태양은 또 왜 구름 뒤에 숨어 있는가. 빈 창틀엔 ‘못 생긴 나무’ 묵연히 서 있고, 성급한 바람마저 ‘존재의 흔적’을 지우며 다른 나뭇가지로 옮겨가고 있다. 이때, 문득 떠오르는 중국 당시 하나. 대학 시절, 까닭 없이 우울할 때면 친구랑 종종 읊조리던 번역시다.
밤 새 한 가지에 같이 자던 새
날 새면 제각금 날아가나니
보아라, 우리 인생도 이러하거늘
무슨 일 서러워 눈물 흘리나.
세월이 오래 되어 원문도 번역가도 떠오르지 않지만,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를 생각하다보니 이 시가 떠올랐나 보다. ‘보아라, 우리 인생도 이러하거늘/무슨 일 서러워 눈물 흘리나.’ 실연의 아픔도, 상실의 아픔도, 부재의 허망함도 이 말 한 마디면 다 위로 받을 것만 같다. 나는 나를 위로 해 주기 위해 <작은 새 한 마리>란 어설픈 시조 한 수를 지어 보았다.
작은 새 한 마리가 퉁기며 떠난 가지
여운으로 흔들리다 제 자리로 돌아간다
내 있다 떠난 자리도 출렁이다 잊혀질까
(어쩌면 먼 머언 날 작은 새로 되오려나)
작은 새 떠난 가지 세월은 오고가고
흔들리는 나무 잎새 옛날을 잊었어라
내 있다 떠난 자리도 낙엽만이 쌓이는가
(어쩌면 먼 머언 날 흰 나비로 되오려나)
어설프게 지은 시에 후렴까지 넣어 악보 없는 노래까지 만들어 보았다. 내 목소리에 맞추어 불러보며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만들었다. 템포는 약간 빠르게 지어 가사가 주는 허망함을 희석시켰다. 노래를 자꾸 부르다 보니 제법 그럴 듯하게 들린다. 템포를 약간 빠르게 만든 탓인지, 가사가 주는 쓸쓸함도 어느새 긍정으로 바뀌어 위로가 된다.
존재와 무흔적. 나 하나 없어도 세상은 제대로 돌아간다는 사실. 그게 세상사 이치라는 것 쯤이야 익히 알고 있지 않았는가. 작은 새 한 마리가 가야할 방향을 향해 미련없이 날아가 버린 것처럼 나도 실 없는 생각 훌훌 털고 일어서야 겠다. 어쩌면, 유한하기에 남은 시간이 좀 더 소중하지 않을까. 작은 새 한 마리가 오늘 아침 내게 주고 간 선물이다. (09-2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