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역 포장마차 / 김정섭

 

 

 

팔월 늦은 장마 속 축축한 바람에 온종일 여우비가 내린다. 마을도서관이 끝나는 시간. 노트북을 접고 우산을 펴들고 외로움도 함께 무작정 길을 나선다. 비가 오면 집을 나서는 오래된 습관이 발길을 재촉한다. 어디로 갈까. 오라는 데도 갈 데도 없다.

혼술하기에 괜찮겠다고 봐두었던 강변역 포장마차가 떠올랐다. 길고 지루한 여름밤 시간 보내기엔 딱 제격이다. 전철로 두 정거장 거리의 짧지 않은 길을 걷기로 한다. 홀로 비 오는 저녁 우산을 받쳐 들고 걷는 길은 운치가 있다. 차를 타고 다닐 때는 볼 수 없었던 거리 풍경이 살갑게 다가온다. 도로 옆 쇼윈도가 따라왔다.

얼마쯤 걸었을까. 정류장을 지날 때 강변역 가는 버스가 정차했다. 낭만도 잠깐, 반사적으로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졌다. 마을버스는 투어라도 하듯 동네 구석구석을 돌고 돌았다. 갑자기 재수 시절 ‘강변 가요제’를 보기 위해 경춘선을 타고 북한강을 굽이굽이 돌아 청평역에 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늘 쫓기듯 그곳에서 벗어나고만 싶던 고장 난 시한폭탄이었다.

강변역에 도착했다. 거대한 콘크리트 궁전 같은 호사한 강변역은 퇴근 시간 갈 길 바쁜 지친 모습의 사람들뿐이다. 늘 그렇듯이 틀에 박힌 한 치의 여유 없이 바삐 떠나가고 떠나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그런 무리 속에서 나만 오갈 데 없는 낯선 이방인이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 가끔 길을 잃고 헤매는 날이 있다.

역 주변 구의공원 앞에 열댓 개의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다. 포장마차의 상호명은 일련번호로 되어 있고, 메뉴와 가격도 거의 비슷하다. 잘 모를 땐 중간이 제일이라는 말에, 가운데 7번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포장마차 속 양옆으로 놓인 테이블 위 꽃병 속엔 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자연스럽게 분위기에 이끌려 그곳에 앉았다. 하지만 젊은 남자 사장은 혼술 손님은 커플석에 앉을 수 없다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순간 그냥 나가버릴까 하다 어묵 끓는 냄비와 안줏거리로 어수선한 나무 의자로 쫓기듯 내몰렸다. 언제부터인지 부쩍 노여움이 는다. 내겐 용서는 없고 망각도 없다.

닭똥집과 소주를 시켰다. 서비스로 나온 어묵꼬치와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물에 속을 달랬다. 소주 한 잔을 마시고 깨소금이 뿌려진 닭똥집을 소금에 찍어 한입에 넣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포장마차에서 먹던 맛 그대로다. 조금 전 사장에 대해 불타오르던 분노는 한잔 술에 물거품처럼 사그라들었다. 이놈의 변덕은 늘 여름 날씨같이 종잡을 수 없다.

비 내리는 포장마차 밖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그야말로 옛날 동시 상영관에서 보던 온통 회색 비가 내리는 칙칙한 흑백영화였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에서처럼 화려한 우산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슬픈 주제가 <I will wait for you>만이 촉촉하게 여며 든다. 그때 나는 비 오는 날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비를 바라보는 한 마리 고양이였다.

“야. 니가 뭐가 외로워?”

지인들에게 가끔 듣는 말이다. 웃프다. 대답하기 민망한 질문으로 사람을 한없이 막막하게 한다. 배역에 적응하지 못한 삼류 배우가 막이 내리고 무대 뒤로 내려왔을 때 어색함에,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은 외면과 포기였다. 얻으려면 내려놓는 것이 세상 이치, 나는 그런 세상을 이해해야 했다. 맞지 않는 어색한 옷들을 훌훌 벗어버리고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 그래서 나는 지금이 참 좋다.

포장마차 앞 복잡한 버스 노선이 어지럽게 그려진 버스 종점이 보인다.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쏟아져 내렸다. 저들은 이제 또 어디로 갈까. 고달픈 청춘들의 모습에서 내 한 시절이 겹쳐져 보였다. 어디선가 스터디 카페를 전전하고 있을 막내아들이 떠올랐다. 씁쓸한 마음에 연거푸 술잔을 비우자 이내 술병은 바닥을 드러냈다.

본격적으로 발동이 걸려 호기롭게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그때 포장마차 안으로 들이치는 빗방울이 술잔에 빠졌다. 갑자기 조각난 기억들이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내게 추억은 지난 이야기가 아니고 언제나 두고두고 새로운 노래다. 때론 무모하고, 어설프고, 한때 격정이었던 관객 없는 영화 같은 옛 기억들을.

빗줄기처럼 흘려보낸 지난날들이 그리움으로 변해 밀려왔다. 기다릴 사람은 하나 없지만 나를 떠나버린 사람들을 기다려줘야 할 것만 같았다. 언제부턴가 시선을 버스 정류장에 고정시켜 내리는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스캐닝했다. 한 장 두 장 책장을 넘기듯, 계속해서 한 잔 두 잔 술잔을 넘기듯이.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했다. 어차피 잡을 수 없는 그 바람 같은 세월을 다 흘려보냈다. 나를 한껏 비웃고 있을 때, 헛헛한 마음에서 작은 움직임이 슬금슬금 피어난다. 텅 빈 마음이 오히려 편하다.

시간이 꽤 지나 포장마차 밖은 어두운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그 환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가는 길도 걷기로 한다. 비 개인 밤 인적 드문 거리를 걷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터벅터벅 내딛는 걸음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헤어지던 골목길의 기억들이 맴돌아갔다.

문득 가로등에 말을 걸고 싶었다. 종일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어느 시인의 참외처럼 ‘참 외로운’ 마음이, 그래도 오늘 밤 뜨거운 가슴이 있어 나쁘진 않다. 혼자일 때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 지고 다시 또 피는 삶을 위해 나의 오래된 노래를 부르며 돌아가는 길을 서두른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

<에세이문학 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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