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신호등 앞에서

 

                                                                                                             이희숙

 

 

 

  하굣길에 어린이를 태우고 조심히 운전하고 있었다. 주변의 차와 같은 속도로 흐름을 유지하며 가는데 갑자기 앞차가 비상등을 켜며 섰다. 서 있는 차를 비켜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져 순발력이 필요했다. 깜빡이를 켜고 수신호를 주며 차선을 바꾸려는 신호를 주었지만 웬걸 양보할 줄 알았던 뒤차는 오히려 '빵빵'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내 앞으로 끼어들며 더 빠른 속도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급한가 보다'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얼마를 달려 빨강 신호등에 걸렸다. 서서히 차를 멈추고 보니 바로 그 차가 신호등 앞에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 아까 내 앞을 추월해 갔는데. 그렇게 빨리 갈 것 같았지만 나랑 같은 곳에 서 있잖아' 결국 다시 만나는 모양새에 나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초록 불을 기다리는 사이에 많은 생각이 몰려왔다. 목표를 빨리 달성하려고 나도 저렇게 무례하게 달렸을까? 제 속도로 주행한 사람과 신호등 앞에서 어차피 만나는걸. 귀에 거슬리는 소리까지 내면서 양보와 배려 없이 행하지는 않았는지를 점검했다. 이민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는 내 생각에 빨간 불이 켜졌다.

 

  도전하며 급하게 살아온 내 이민의 삶을 되돌아본다. Day Care Center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은 불모지에서 새로운 터를 닦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의 교직 경력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생소한 지역에 뛰어들어 하나하나 규칙과 법을 배워야 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시간도 연장하여 학부모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17개국이 넘는 여러 인종을 어우르며 다민족 어린이를 양육해 왔다.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타인종과 조화를 이루어 많은 것을 성취했다고 자신했다. 그 결과 지역 커뮤니티와 이민 사회에 필요한 교육기관으로 한몫을 하며 성장했다. 특히 한국 문화와 음식을 접할 수 있는 장점에 한인 커뮤니티에 좋은 호응을 얻었다. 많은 어린이가 입학하므로 규모를 확장해야 했다. 그동안 운영하던 애너하임 지역을 벗어나 제2의 학교를 설립할 장소를 물색했다.

 

  플러턴에 학교 부지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지역을 선정하여 1에이커의 넓은 빈터가 있는 주택을 구매했다. 주변에 세 개의 초등학교, 명문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자리한 한인이 많은 지역이었다. 이곳은 상업지역이 많지 않아 넓은 땅을 구하기 어려웠고, 주택지 용도(Zone)를 변경하면 학교 설립도 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다. 조건부 허가를 통해 사립학교를 건축하는 여러 예를 보기도 했다. 먼저 주 정부인가와 조건부 허가 (CUP)를 취득하기 위해 주민공청회를 통과해야 했다.

 

  이웃집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시간적 여유를 갖은 5년 후에 설계도와 함께 조건부 허가서(C.U.P)를 신청했다. 당일에 공청회에 대한 공지를 전달받은 주민들이 우리 집을 둘러본 후 시청 회의실에 모였다. 한인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한인이 있으면 조금이나마 힘이 될 터인데, 길 건너 한동네에 몰려 살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나이의 노 소를 불문하고 빠짐없이 참석해 지역을 지키려는 백인들의 열성과 적극적인 태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시청 회의실에서 처음 순서로 나는 일하는 부모를 위해 취학 전 아이를 위한 보육 시설과 방과 후 돌봄 시설이 필요하다는 취지와 계획을 발표했다. 커뮤니티를 위해 있어야 할 교육기관이므로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주민들이 의견을 표명했다. 모두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어린이를 안전하고 교육적으로 돌보겠다는 당신의 계획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우리 조부모부터 3대에 이르러 사는 주택지이므로 다른 상업지역을 찾아보십시오. 우리는 변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소음과 교통 체증도 생길 테니까요...."

 

  시의원의 투표 결과는 찬성표 2, 반대표 4로 부결되었다. 주민의 의견을 수렴해야 했다. 학교를 짓는 계획서는 쓸모없는 종이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갔다. 어린이 학교 건축을 포기한 채 20년이 넘도록 빈 땅으로 남아 잡초만 무성하다. 가장 아픈 이민 흑역사가 되어.

 

  의지와 열정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뒤늦게 알았다. 이민자가 겪는 힘든 과정이라 생각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깊은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주민의 눈에는 낯선 아시아인의 무례한 시도라고 보였을 것 같다. 법을 무시하며 상식을 깨는 행위로 보였을 수도 있었겠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라는 속담처럼. 무식이 용감이었다고 할까. 보수적인 시의 분위기와 주민의 성향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의욕만으로 덤볐던 성급함을 이제야 깨닫는다.

 

  나와 사물, 상황을 겸손하게 돌아본다. 몇 번의 인생 빨강 신호등에 걸렸던 시간을 돌아보며 '틀려도 괜찮아.' '늦게 도착하면 어때.' '시행착오가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어.'라며 나를 다독인다.

서시오! 깨달음과 경각심을 주는 빨강 신호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