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지인이 영상 하나를 보냈다. 그저 흔하디흔한, 훈계조의 그렇고 그런 내용이 아닐까, 의구심도 살짝 스쳤다. 그러나 평소 그녀의 성품으로 보면 허섭스레기 영상을 보낼 리가 없다. 그러니 기대해볼 만하다.
“4분짜리 영화로 이집트 룩소르 영화제에 출품하여 상 받은 영화인데 감독이 스무 살이라네요~~^^”라는 문구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영상이 시작되었다.
카메라는 소음 속에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다리와 발에 초점을 맞춘다. 발걸음이 모두 분주하다. 그중 누군가 맨발에 샌들을 신었는데 한 짝이 자꾸 벗겨지는 장면이 클로즈업된다. 이어 앳된 소년의 모습이 비친다. 소년은 샌들 한 짝을 벗어들고 맨발로 길 한구석에 가서 앉는다.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의 끈이 떨어진 채 너덜너덜한 샌들을 다시 신어보고 이리저리 돌려보며 고치려 애쓰지만 구멍이 나서 꿰어지질 않는다. 낙심한 표정이 역력하다. 그때 소년의 눈길이 한 곳에 끌린다. 하얀 양말에 검정구두를 신은 발길이다. 부러운 듯, 그 구두를 좇아 끝까지 시선을 놓지 않는다.
구두의 주인공은 제 또래의 소년이다. 그 아이는 길을 가다가도, 의자에 앉아서도, 틈만 나면 연신 허리를 구부리고 하얀 천으로 정성스럽게 제 구두를 닦는다. 무척 아끼는 모양새다. 그때 기차가 서서히 들어온다. 사람들이 몰려간다. 그런데 가족에 이끌려 기차를 타던 아이의 구두 한 짝이 벗겨지고 만다. 길거리에 떨어진 구두 한 짝, 맨발의 소년이 얼른 달려가 구두를 주워 소중하게 두 손에 받쳐 들고 본다. 신어보려는 걸까. 아니다. 예상을 깨고 기차를 향해 뛴다.
사람들에 떠밀려 기차를 탄 아이가 출입구 난간에 매달려 안타깝게 제 구두를 바라보고 있다. 맨발의 소년이 구두를 들고 쫓아가지만 미처 손이 닿지 않는다. 기차 속력이 점점 빨라지자 소년은 아이가 받을 수 있도록 구두를 던진다. 그러나 구두는 결국 길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소년이 안타깝다는 듯 가슴을 친다. 어쩌나. 그때 또 한 번 반전이 일어난다. 아이가 제가 신고 있던 구두 한 짝을 벗어 맨발의 소년 쪽으로 던진다. 둘은 서로 웃으며 손을 흔든다. 기차는 떠났고 길 위엔 흩어진 구두 한 켤레와 소년만이 남았다.
숙연해진 관객들이 감동의 박수를 보낸다. 누군가는 눈물을 글썽이는 것도 같다. 아름다운 배려가 일러주는 힘이다. 맨발의 소년에게 구두 한 켤레는 소망의 기표였다. 또한 신발은 두 짝이 함께 있어야 온전하게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가난하지만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 소년, 가난한 소년에게 제가 아끼던 구두 한 짝을 던져줄 줄 아는 소년, 그 둘을 보여주는 감독의 목소리는 그 어느 웅변보다도 깊고 울림이 크다.
구두 한 켤레, 내 기억에 숨어 있던 영상 하나가 송곳처럼 불쑥 튀어나와 심연을 건드린다. 열아홉 살, 꽃 같은 나이? 그때 나는 무척 가난한 여대생이었다. 장학금 덕분에 겨우 대학 캠퍼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지만 춘삼월이 다 가도록 고등학교 때 입었던 검정코트를 입고 다녀야 했다. 여름에는 외숙모가 재봉틀로 박아서 만들어준 블라우스나 스커트를 입었고 운동화만 신고 다녔다. 점심은 학교 앞 풀빵 집에서 때웠는데 그때 내 친구 지향이가 거의 매일 무던하게 풀빵을 사줬다. 지향이는 조금 부유한 집 딸이었다. 그래도, 염치도 없지. 그렇게 캠퍼스의 낭만이고 뭐고 즐길 새도 없이 입주가정교사나 과외지도를 하면서 1년을 후딱 보냈다.
2학년 여름이 시작되던 어느 날, 지향이가 명동엘 나가자 했다. 명동? 묻지 말고 가잔다. 그녀가 아직도 유명한 K제화점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왜? 구두를 고르란다. 제화점 구두라니, 그렇게 비싼 구두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고집이 나보다 셌다. 그때 고른 것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신어본 제화점 구두, 연한 노란색 가죽 샌들이었다. 지향이는 신데렐라의 왕자님처럼 내게 구두를 신겨보았다. 구두가 내 발을 감싸듯 그녀는 내 마음을 감쌌다. 그 노랑 샌들은 우정을 넘어서는, 혈육의 정 못지않은 사랑의 메신저였다. 그러나 구두 한 켤레처럼 붙어 다니던 지향이는 이미 저 세상에 가고 없다. 이젠 내 구두 여러 켤레가 신발장을 차지할 정도가 되었지만 고마움에 보답할 길이 없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땐 늘 내 앞가림하기에 바빴다.
영화에서 샌들과 검정 가죽구두가 가난과 부의 상징이었듯 신발은 실존의 대명사이며 삶의 흔적을 담고 있다. 고흐는 낡은 구두 그림에 고단한 삶의 연민을 담았고, 박목월 시인은 자신을 “十九文半의 신발”로 환치했다. “屈辱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내가 왔다./아버지가 왔다./아니 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시 <삼동시초> 연작 중 <가정>에서)고 하며 가족을 “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로 표상한다.
내가 어릴 적, 어머니는 가족들 고무신을 정갈하게 닦아 댓돌 위에 올려놓곤 했다. 바깥마당을 향해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코는 늘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꿈꾸는 듯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차례로 돌아가시면서 고무신도 한 켤레씩 댓돌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주 귀한 신발 한 짝을 잃고 한 발은 맨발로 걸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만 셈이다.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고 시장판으로 나가게 되면서부터 고무신은 허름한 운동화로, 버선은 양말로 바뀌었다. 나이 마흔에 이승 떠나면서 염습자리에서야 세상사 훌훌, 신발을 벗고 버선발로 편안히 누우셨다.
내 아이들이 결혼해서 제각기 가정을 꾸린 지금 신발장엔 우리 내외의 신발만 255mm와 245mm로 누워있다. 가끔 아이들이 와서 신발이 현관을 꽉 채울 때면 마음도 하나 가득 풍성해진다. 오늘 따라 신발장을 정리하고 현관에 흩어진 신발들을 가지런히 놓아본다. 지금까지 구두 한 켤레처럼 발걸음을 맞추며 살아온 남편과 나, 우리 신발이 언제까지 나란히 현관을 지킬 수 있을지, 그 시간이 오래기를 바라는 건 나이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