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사람치고 작품을 퇴고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퇴고推敲'라는 말 또한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승퇴월하문僧推月下門'이라는 종장을 지어 놓고 밀 '퇴推'로 할 것인가 두드릴 '고敲'로 할 것인가 고민하던 중에 지나가던 경윤 한유가 '고敲'로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생겨난 어휘라는 것을 모르는 문인도 없을 줄 안다.
대부분의 문인은 자신이 쓴 작품을 습관적으로 손본다. 글을 쓸 때는 이모저모 생각하다가 자칫 문맥을 놓치거나 어느 부분은 과장하고 어느 부분은 빠뜨리는 경우도 생겨서 퇴고하지 않으면 완성된 작품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퇴고를 하다 보면 무슨 어휘가 걸리든지 하다못해 오탈자 하나라도 발견되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글을 쓴 다음에는 반드시 퇴고의 수순을 밟는데 가장 먼저, 문맥이 잘 통하는지부터 살핀다. 그리고 더하거나 뺄 부분은 없는지, 오탈자는 없는지의 순으로 글을 살펴본다. 이런 작업을 서너 번 반복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열 번 가까이 손을 볼 때도 있다. 나는 이러한 퇴고 버릇이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분의 퇴고 소감을 쓴 글을 읽으니 그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분은 한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무려 27회를 퇴고했으며, 그것도 미진하다 싶어 그 후로도 7회를 더하여 도합 34회나 글을 고쳐 썼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작품을 읽으며 글을 신인 같지 않게 잘 쓴다고 느꼈는데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보면 신인이라고 하여 결코 가볍게 대할 일이 아닌 듯하다. 그런 퇴고의 자세를 보니 문득 경우는 다르지만 전에 들었던 어떤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이야기인즉슨, 어느 날 나이 많은 농부가 길을 가다가 모판에 볍씨를 뿌리고 있는 한 소년을 보았다. 그걸 보고 노인이,
“저 집 농사는 올해 파농하게 생겼군. 쯧쯧.” 하며 혀를 찼다.
그러자 소년이 듣고는 대꾸했다.
“노인께서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얼마나 씨앗을 많이 뿌려 보았다고 그러십니까?”
이에 노인이,
“걱정이 돼서 혼자 했던 말이네. 내 칠십 평생을 살면서 오십 년 넘게 씨를 뿌려 왔지만 지금도 그 일이라면 자신이 없는데, 어린 사람이 오죽하겠는 가?”
하자, 소년은 정색을 하고 하나의 제안을 했다.
“그럼 누가 씨앗을 잘 뿌리는지 내기를 해 볼까요?”
그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씨뿌리기를 겨루게 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소년이 훨씬 나았다. 노인이 의아해하자,
“어른께서는 오십 년 동안을 씨를 뿌렸다고는 하나 기껏 오십 번 정도 뿌렸겠지요. 저는 맨땅에다 금을 그어 놓고 수백 번도 더 연습했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노인은 그야말로 연중행사로 한차례씩 볍씨 뿌리기를 했지만 소년은 그보다 연습을 많이 했던 것이다. 소년이 씨뿌리기를 실습한 것처럼 끈질기게 다듬은 글은 어디가 달라도 다를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의외로 퇴고에 대해 전해 오는 이야기가 많다. 러시아의 문장가 투르게네프는 글을 3개월 간격으로 퇴고했으며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를 200번도 넘게 고쳤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문호 구양수와 「적벽부」를 쓴 소동파의 방에서는 폐지가 한 삼태기나 나왔다지 않은가. 대단한 자기 관리요, 엄격한 글쓰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걸 생각하면 꼭 일필휘지를 부러워할 것도, 자주 퇴고하는 걸 부끄럽게 생각할 일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전에 문예지에 작품을 투고해 놓고 나서 여러 차례나 고치겠다고 한 적이 있어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폐를 끼친 일은 분명 반성할 일이나 그 퇴고 행위 자체는 크게 흠은 아니었지 싶다. 하지만 작품을 보내기 전에 좀 더 충실하게 퇴고하는 게 백 번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