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솔길을 펼치다 / 윤승원
산그늘에 앉아 올라왔던 길을 내려다본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곡선이 굽이굽이 능선을 휘감으며 시냇물처럼 흘러간다. 등산로 초입부터 어깨를 겯고 졸래졸래 따라오던 오리나무며 상수리나무도 다소곳이 곁에 앉아 숨을 고른다.
오솔길의 사전적 의미는 폭이 좁은 호젓한 길이다. ‘오소리가 다니는 길’, ‘오소리길’이라 부르다가 오솔길이 되었다는 유래도 있다. 오소리는 평소 늘 다니던 길을 찾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짧은 다리로 가던 길만 다니니 오소리가 오가던 곳은 자연스레 길이 난 것이리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걷기 편한 넓은 길을 선호하지만 나는 왠지 인적이 드문 호젓한 길을 좋아한다.
잘 닦여진 길은 아무래도 산행의 맛이 덜하다. 여럿이 섞여 가다보면 주변의 풍광을 놓치는 경우가 있기도 하고 서로 앞 다투어 걸으니 다소 번잡스럽다. 하지만 수풀 사이로 보일 듯 보이지 않게 살짝 비켜나있는 오솔길은 왠지 정감이 간다. 바쁘지 않고 느긋하여 생각에 집중할 수 있고 무엇보다 마음이 고요해져 좋다. 크고 화려한 것들이 세상의 주목을 받는 듯 하지만 실제론 작고 소박한 것들이 더 알찰 때가 많다.
오솔길처럼 변화무쌍한 길이 또 있을까. 봄이면 쫑긋 여린 꽃잎을 내미는 바람꽃과 노루귀가 반가워 얼른 쪼그려 앉게 된다. 싱그러운 잎사귀가 그늘을 만들어주는 여름엔 몸과 마음이 초록으로 물이 든다. 가끔씩 만나는 소나기는 당황스럽지만 잠시 멈추어 서서 비의 연주를 듣는 맛이 있다. 낙엽이며 단풍과 더불어 은빛억새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가을엔 아늑한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거기다 은은히 풍겨오는 구절초향기는 호사스런 덤이다. 겨울산행은 망설여지지만 마음먹고 나선 길에 눈을 만나기라도 하면 괜히 그리운 누군가가 생각나 설레기도 한다.
르누아르의 그림 중에 <풀밭사이 오솔길을 올라가는 여인들>란 작품이 있다. 풍성하고 짙은 색 긴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걷고 있다. 풀밭 사이로 수를 놓듯 들꽃이 피어있고 드문드문 키 큰 나무 몇 그루가 길을 안내한다. 살짝 부는 바람사이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던가, 하얀 길을 따라 그녀들이 금세라도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올 것만 같다.
오솔길을 걸을 땐 큰길을 걸을 때보다 조심해야 한다. 하지정맥처럼 불쑥 솟아오른 나무뿌리를 잘못 디뎠다간 미끄러져 넘어지기 십상이다. 이른 아침엔 거미줄이 길을 막아 귀찮을 정도로 얼굴에 달라붙기도 한다. 산이 깊을수록 괜한 무섬증이 일어나는 것은 아무래도 호젓하기 때문일 것이다. 숲에서 푸드덕 꿩이라도 날아오를라치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있어 오히려 긴장감을 유발하니 지루하지 않다. 크고 작은 고난과 역경이 있어야 삶이 깊어지는 것처럼.
돌아보면 오솔길을 걷는 듯 우여곡절이 많았다. 중3때, 고등학교진학을 앞두고 아버지는 산업고등학교를 가라고해 갈등을 겪었다. 그렇지만 고3때까지도 대학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순 없었다. 인문계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취업하기란 쉽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건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혼하면 내가 살고 싶은 삶을 꾸려나갈 줄 알았으나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혼자여도 둘이어도 외롭긴 마찬가지였다.
수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외딴길이 된 친구가 있다. 세상이라는 거친 숲에 혼자 남겨졌어도 그녀는 언제나 꿋꿋하게 살아간다. 소박하고 검소한가하면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도 감탄할 줄 아는 정 많은 사람이다. 척추측만증이 심해 장애가 있지만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을 앞장서 돕는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작은 체구에 말을 할 땐 목소리를 낮춰 조곤조곤 얘길 한다. 속상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 넋두리를 늘어놓으면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고마운 친구다.
오솔길에선 각별한 조우가 이루어진다. 초원하늘소며 딱정벌레, 풍뎅이를 만나는가하면 청설모가 쪼르르 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어느 날엔 새끼를 등에 업은 두꺼비가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멀지 않은 날에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싶어 내심 기대를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오소리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 녀석은 제 길을 놔두고 어디로 다니고 있는 것일까?
오솔길은 적당히 드러내고 알맞게 감추는 분별심이 있다. 큰길처럼 제 속의 것까지 다 드러내지 않고 가파른 비탈길처럼 짐짓 내숭떨지 않는다. 직선이 아니라서 딱딱하지 않고 가파르지 않아서 수월하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호들갑스러우면 왠지 신뢰가 가지 않고 너무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면 다가서기 어렵다.
글쓰기로 치자면 오솔길은 수필이다. 시처럼 빛나는 비유나 소설의 대하 같은 서사는 없지만 한 사람의 진솔한 삶과 사색이 어우러져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오솔길은 은근한 맛이 있다. 화려하다거나 값비싼 음식은 아니지만 자꾸 먹고 싶은 쫄면 같기도 하다. 사십년 단골집 쫄면은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면발에 국물 맛이 일품이다. 유부나 어묵이 들어가 맛을 더하는데 살짝 얹은 쑥갓은 금상첨화다.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지는 길이 예뻐서 ‘좋다. 참 좋다’ 나도 모르게 감탄을 연발한다. 춤을 추듯 왔던 길 돌아보고 또다시 앞으로 걷기를 반복하면서 핸드폰에 꼭꼭 눌러 담는다. 어떨 땐 내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길이 나를 걷는다. 그럴 때 길과 나는 한 몸이 된다. 나무와 풀꽃, 새소리와 구름과 바람이 되기도 한다. 오솔길을 자주 걸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껴보지 않았을까.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고 싶은 사람들은 걷기 편안한 큰길로 가고 싶어 한다. 삶의 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이왕에 가야하는 길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사람의 인상이야말로 오솔길처럼 편안하고 부드럽지 않을까 싶다.
저쪽 앞에서 부부가 다정스럽게 손을 맞잡고 걸어온다. 표정이 선하고 맑다. 내 모습도 저들처럼 편안해 보였으면 좋겠다.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질인다. 어느새 등허리의 땀이 식어 서늘하다. 무거웠던 몸과 마음이 구름처럼 가벼워진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니 오솔길 저도 슬쩍 엉덩이를 털며 길채비를 한다.
<에세이문학 202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