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그리다 / 맹난자
원인불명의 미열이 열흘째 계속되고 있다. 혼곤한 미망 속에 점점 가라앉는 느낌이다. 2차 백신 접종 날짜가 가깝게 다가오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주사를 포기해야 하나? 온 국민의 지상명령과도 같은 임무를 방기하려니 마음이 개운치 않다. 그러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 '몸이 가도록 내버려두겠다'며 몇 년 전부터 건강검진도 하지 않았고, 당뇨합병증검사며 특히 의사가 권하는 뇌혈관 동맥검사도 미루어왔던 것인데 이제 와서 백신주사를 놓고 이렇게 갈등을 하고 있다니, 이중적인 내 마음을 돌아다보게 된다. 죽기 싫은 것인가?
어찌하여 그대들은 뒤로 물러서는가? 아무에게도 도망칠 구멍은 없지 않은가. 그대들은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써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을 누리게 된 것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죽어서 손해를 본 사람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몽테뉴의 글을 읽으며 얼마나 공감했던가. 움직일 수 없는 낡은 수레처럼 정지된 몸, 104세가 된 식물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는 휠체어에 앉아 '더 이상 삶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며 스위스에서 자발적 안락사를 택했다. 몸이 의지대로 되지 않아 넘어지면서 삶의 질이 악화된 것을 느꼈다고 했다.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대지는 육신을 주어 나에게 짐을 지우고, 삶을 주어 고달프게 하고, 늙음으로 나를 편안케 하고,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 따라서 삶이 좋은 것이라면 죽음 또한 좋은 것이다"라던 장자莊子의 철학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죽음을 순순히 수긍했던 터였다.
죽음이란 온갖 의미가 면제된, 그야말로 근심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더없이 좋은 일이 아닌가. 문제는 그 길로 가는 도정道程이 길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병의 과정을 제하고 노사老死로 바로 가면 더없이 좋으련만, 그러나 사고사가 아니라면 우리 대부분은 아프다가 죽는다.
몸이 떠날 때가 되었는데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 애쓰는 사람들의 고통을 생각해본다. 보스턴의 한 호텔방에서 "왜 빨리 죽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고함치던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 그는 파킨슨으로 2년 동안 그곳에 유폐되어 있었다. 폐기종을 앓던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23년 전, 나는 역사 속 인물들(108명)의 마지막 순간을 채집하여 책으로 묶은 적이 있다. 졸저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를 본 모 방송국 PD가 나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막상 어떻게 죽을 것이냐?"고 물어왔다.
"책에서 언급한 대로 좋은 죽음의 모델들을 제시할 수는 있겠으나 과연 그것대로 죽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오 주여!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게 하소서"라던 릴케의 그것이 내겐 화두라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내 자신의 죽음을 죽을 수 있을까?
나는 PD에게 의료행위를 거절하고 타계한 재클린 케네디 여사의 존엄사를 거론한 뒤, 나의 경우 다만 어떠한 연유에서건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게 되었을 때, 그때 죽음이 찾아와준다면 더없이 좋으리라는 생각이며 떠나려는 시간과 끊어지는 시간이 적절하게 맞추어지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그러나 어찌 시간이 마음대로 맞추어지겠는가? 자의로 목숨을 끊기 전에는.
미국의 사회개혁자 스콧 니어링은 100세가 되자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죽을 수 있었다. 스스로 식음을 전폐해서였다.
"몸이 가도록 두어요. 썰물처럼 가세요…." 옆에서 아내 헬렌 니어링의 조력이 남편의 항해를 도왔다.
나른한 미열, 방과 후 책가방이 무거워 언덕 위의 집을 바라다보던 열여섯 살짜리는 그 후 몸으로 여러 질병과 그리고 세상의 풍우와 맞서다가 어느새 80객이 되었다. 아픈 곳이 적지 않다. 헬렌 니어링의 권고대로 몸이 가도록 내버려둬 갈 때는 썰물처럼 지체 없이 가고 싶다. 다만 아픈 몸을 가지고 저 레테의 강을 어떻게 건너야 할 것인가. 그것이 숙제이다.
요즘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를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는 수술로 인해 7개의 늑골을 잃고 한쪽 폐가 잘려 나갔지만 잃은 것에 비해 얻은 것이 훨씬 큰 것이었다고 말하며,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용할 가치가 있으며 인생에서 헛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세 번의 폐 수술 이후 복막투석을 받으며 마지막 작품《깊은 강》집필에 매달려 있었다. 약의 독성이 온몸에 퍼져 가려움증에 시달리자 "마치 욥 같군요"라는 아내의 말에 그는 "그래, 욥과 같은 고통이구나. <욥기>를 쓰자"고 큰 소리로 말했다. 구약성서의 욥은 가축을 모두 빼앗기고, 종들도 모두 죽임을 당한다. 자식들이 몰살을 당하고, 자신은 피부병에 걸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다. 하나님이 사탄의 손에 욥을 맡겨 시험해보도록 한 것이다. "나는 이 고통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몰라요. 하지만 인간의 지혜를 넘는 계획 속에 반드시 의미가 있을 것이므로 '고통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주제로 글을 쓰려고 해요." 그러나 그 후 상태가 악화되어 <욥기>를 쓰지는 못했다. 하지만 <욥기>를 쓰자고 선언한 후, 엔도는 고통이나 온몸의 가려움에 대해 푸념이나 한탄 같은 것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고 한다.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아버지께서 <욥기>를 쓰려고 결심한 뒤부터 일생을 통해 애써온 대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라는 장남 엔도 류노스케의 술회였다. 엔도 슈사쿠는 '꽤 잘 살았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지만 죽기도 잘 죽은 사람이었다. 그의 최후가 그 사람의 전부인 까닭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 몸으로 고통의 의미를 되새기며, 삶의 균형을 잃지 않았던 사람, 성자의 모습을 닮아가던 그의 죽음을 그려보게 되는 것이다.
<한국산문 2021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