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남자 / 장미숙
저 늙은 남자는 오늘도 나를 슬프게 한다. 등이 조금만 덜 굽었더라면, 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손이 조금 덜 뭉툭했더라면, 인사할 때 고개를 너무 숙이지 않는다면, 한쪽 다리를 절지 않는다면 나는 덜 슬프겠다. 하지만 그는 등이 살짝 굽었고, 키는 보통에도 미치지 못하고, 손은 거칠고 투박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주인에게 고개를 너무 깊이 숙여 인사한다. 그리고 걸음걸이가 약간 부자연스럽다. 자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지 때로 궁금하게 만든다.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닐 때마다 그의 어깨를 쫙 펴주고 싶고, 고개를 깊이 숙이지 않도록 뒷덜미라도 붙잡고 싶다.
오늘도 그를 보았다. 내 자전거가 그의 앞을 지나갈 때 그는 건물 사이 골목에 있었다. 매일 같은 옷에 같은 가방에 같은 신발을 신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였다. 한 대 얻어맞은 뒤 사방을 경계하는 사람처럼 불안한 표정이었다. 주인보다 몇 분만 더 늦게 나오면 기다리지 않아도 될 텐데 그는 왜 항상 일찍 와서 저리 서성이는 걸까. 초조하고 초라하게 서 있는 그의 등 뒤, 공간이 그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언젠가 출근길에 그의 뒤를 따른 적이 있었다. 그는 앞에서 걷고 있었고 나는 천천히 자전거 바퀴를 돌렸다.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의 등에는 슬픔이 자리 잡고 있었다. 슬픔이라니, 그 많은 감정 중에 나는 그에게서 굳이 슬픔을 봐야만 하는 이유가 뭘까. 나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지극히 타인인 그에게 감정소비를 하며 그의 뒤에서 우울한 아침을 맞았다.
그는 내가 일하는 곳의 옆 건물에 있는 가게 직원이다. 그를 오래도록 보아왔지만 이름도 사는 곳도, 나이도 모른다. 말을 건네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시야에 들어온다. 어쩌면 내가 그를 포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자꾸 신경이 쓰여서 옆 건물을 흘끔거린다. 아침에 출근할 때, 화장실에 가기 위해 나왔을 때, 그리고 퇴근할 때, 푸른색 옷을 입은 그를 본다.
그는 나보다 더 먼저 이 거리에 존재했다. 내가 일한 지 10년이 되어가니 훨씬 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옆 가게는 주인이 한번 바뀌었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곳도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나 우리는 붙박이가 되어 새로운 주인들을 모시고 양쪽 가게에서 일한다. 가족이 운영하는 가게라는 점도 같다. 내가 먼저 퇴근하므로 그의 퇴근 시간은 모른다. 그와 확실하게 다른 점이라면 그는 가게 열쇠를 갖고 있지 않고, 나는 열쇠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출근 시간은 같지만, 그는 아침에 주인을 기다리며 밖에 서 있고, 나는 직접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아침에 그를 보고 싶지 않은 건 겨울철이다. 열쇠가 없는 그는 밖에서 주인 부부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도 그는 건물 사이 공간에 고목처럼 서 있다. 어둠 속에서 눈만을 밝히며 파랗게 얼어있는 그를 볼 때면 이유 없이 화가 났다. 왜 직원에게 열쇠를 주지 않느냐고 주인에게 따지고 싶었다. 아니, 그에게 왜 아침에 일찍 나와서 달달 떨고 있느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생각뿐이었다. 주인 부부는 자동차를 타고 출근했고 차가 도착하면 그는 그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유난히 폭설이 잦았던 지난겨울, 가게 앞 눈을 치우는 사람은 그였다. 눈이 쌓이기 바쁘게 그는 빗자루를 들었다. 쓱쓱, 빗자루 소리가 들려 내다보면 어김없이 그는 눈을 쓸고 있었다. 굉장히 야윈 주인 남자와 몸집이 큰 주인 여자는 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 하늘색 면 마스크를 쓴 그가 낡은 잠바를 입고 열심히 눈을 쓸었다. 나도 눈을 쓸긴 했지만, 주인이 없을 때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었다. 그도 나처럼 눈 치우는 게 재미있어서 쓰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옆 가게 주인 여자는 빵을 좋아하는지 일주일에 두어 번 빵을 사러 왔다. 몸집이 보통보다 큰, 그 여자는 성격이 모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어떤 주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침마다 종이컵을 손에 든, 담배를 좋아하고 깐깐해 보이는 주인 남자 또한 그에게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이 그에게 열쇠를 주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그들을 나쁘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열쇠는 신뢰와 믿음을 상징하므로 의문이었다. 이미 전 주인으로부터 그가 성실하다는 걸 전해 들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내 추측이랑은 거리가 멀 수도 있다. 나처럼 그가 여러 조건상 다른 곳에 취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면 그는 고개를 낮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순이 넘어 보이는 데다 순박한 모습은 다양한 성격 변화를 상상할 수 없게 하니 말이다. 추위를 무릅쓰고서라도 일찍 나와 주인을 기다리는 이유가 그의 절박함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다. 굽히고 숙이고 참아야만 하는 모든 것들이 생존보다 우선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척 성실해 보였다. 가게 안에서는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밖에 있을 때 그가 쉬는 걸 본 적이 없다. 하다못해 쓰레기를 주울지언정 그는 종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작은 오토바이에 물건을 가득 싣고 종횡무진 도로를 누비는 것도 그였다. 오토바이에 올라탈 때만은 키가 유독 작아 보이지도, 한쪽 다리가 짧아 보이지도 않았다. 부릉부릉, 도로를 가로질러 가는 모습은 젊은이들 못지않게 재발랐다. 배달은 모두 그가 하는 모양이었다.
가게의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는 듯 안보다 밖에 나와 있을 때가 많았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일을 그는 묵묵히 했다.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묵묵하다는 말이 가장 어울릴 듯싶다. 문득 나는 궁금해졌다. 옆집 가게 주인들은 나를 어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내가 모시는 점주들은 옆집 주인들이 그를 함부로 대한다며 동정했다. 함부로 한다는 말이 몹시 걸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고개를 쳐드는 열등감을 애써 누르며 부러 당당하게 그들 앞을 지나가곤 했다.
내가 그를 보며 느낀 건 슬픔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겼다. 동정과 슬픔의 차이는 뭘까. 같은 맥락이라고 할지라도 그를 동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몸을 움직여 하루를 성실하게 사는 그를 동정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가슴 언저리가 뻐근해지는 슬픔 앞에 가끔 무너질 뿐이었다.
내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설 때 그의 굽은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주인 차가 올 쪽을 바라보며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내가 만약 그런 처지라면 주인보다 늦게 나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잘 익은 슬픔 덩어리 하나가 천천히 가슴속으로 가라앉았다.
<에세이문학, '에세이 광장' 202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