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소를 담그며 / 박금아
풀을 씻는다. 풀잎 속에서 날개를 비비던 방울벌레 한 마리가 놀라 달아난다. 여치 두 마리는 궁둥이를 맞댄 채로 고요하다. 머루와 다래 순, 궁궁이, 소루쟁이, 달맞이꽃……. 김매기를 한 품삯으로 받아온 산야초로 효소를 만들기로 했다. 여러 번의 헹굼 끝에 풀들은 말간 몸으로 소쿠리에 누워 있다.
농사 피정*을 다녀온 것은 우연이었다. 작은 텃밭이라도 갖는 것이 꿈이었기에 밭일하며 피정이라니, 일거양득일 것 같았다. 그런데 두 주일 동안 한 일은 김매기가 거의 다였다. 어린 풀은 손으로도 뽑을 수 있었지만, 많이 자란 것들은 낫으로 베거나 호미나 괭이로 파내야 했다. 제 자리를 고집하며 완강히 버티는 풀들과 씨름하느라 밭에 나동그라진 적이 여러 번이었다. 일행은 그런 나를 신들린 사람 같다고 했다. 하긴 얼마나 뽑아버리고 싶었던 잡초이던가.
시가와 친가는 지구의 양 극점에 있는 땅 같았다. 나의 고향은 한반도의 남쪽 끄트머리이고, 남편은 북쪽 평양이었다. 나는 여섯 딸 부잣집의 맏이였고 남편은 아들만 셋인 집의 장남이었다. 일가친척과 뱃사람들로 늘 북적이던 친가와 달리 시가는 식구들뿐, 적막강산이었다. 종교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먹는 것도 달랐다. 친정에서는 해산물만 먹다시피 했지만, 시가는 고기만 좋아했다. 나는 초보 농사꾼이었다. 옮겨온 땅의 토질을 알 리 없었다.
신혼의 밭에 잡초가 돋기 시작했다. 흙의 성질이 달랐기에 돋아나는 풀도 달랐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종류의 풀들이 자주 내리는 여름비에 키를 쑥쑥 키웠다. 어떤 풀이 잡초이고 작물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잡초를 작물로 알고 거름을 풍성히 주기도 했고, 작물을 잡초로 오인하여 뽑아버린 적도 있었다. 잡초를 알아내어 없애더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금방금방 싹을 내밀었다.
그나마 땅에 돋은 김은 매기가 수월했다. 기억 속에 내린 잡초는 고구마 넌출 같았다. 어린 순(荀)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매복한 병사들처럼 줄줄이 헤집고 나와서는 어둠을 펄럭이게 했다. 잡초의 기억들은 모처럼 찾아온 행복한 일상에 덧을 내기 일쑤였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바다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는 해저 지진 같은 것이었을까. 한 번씩 오는 지각 변동은 나를 뿌리째 흔들었다. 여진(餘震) 또한 만만찮아서 오랜 시간을 두고 영혼을 너덜거리게 했다.
들깨밭에 난 김은 매는 대로 있는 힘을 다해 밭두렁 너머 개울가로 던졌다. 밭에 두면 금세 뿌리를 내릴 것 같아 씨를 말려버릴 셈이었다. 그런데 작업반장은 그대로 작물 아래에 놔두라는 게 아닌가. 내다 버린 풀까지 밭고랑에 갖다 놓으란다. 의아했지만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그날 나는 김매기를 하다 말고, 개울가에 널브러진 잡초를 그러모아 밭으로 옮기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마지막 날 저녁때에 지하 창고에 갔다. 항아리가 가득했다. 쇠무릎과 쇠비름, 지칭개, 당귀 등으로 효소를 만들고 있었다. 칡넝쿨, 환삼덩굴, 둥굴레 뿌리를 담근 항아리도 여럿이었다. 뚜껑을 열 때마다 저마다 다른 빛깔과 향내가 느껴졌다. 햇수가 제일 오래되었다는 담쟁이덩굴 독에서는 단내가 물씬 났다. 사람이 먹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풀에서 그토록 달큼한 내음이 나다니 놀라웠다.
떠나오던 날, 이른 아침에 혼자 산밭에 올랐다. 어둑새벽 이슬바심에 놀란 풀잎들이 움칫움칫했다. 내다 버린 김을 옮겨놓았던 들깨밭에 눈길이 갔다. 작은 바람에도 넘어질 것만 같았던 어린 들깨 나무들이 빳빳이 목을 세우고 있었다. 잡초들은 뿌리를 뽑히고도 생을 이어갔던 모양이다. 이슬을 머금어 익은흙에 물로 주고, 모아들인 곤충의 배설물을 품어 거름으로 주다가 마지막에는 제 몸까지 썩혀 두엄으로 내어주며 땅으로 돌아가는 잡초의 헌신에 눈이 뜨였다. 나는 그렇게 거룩한 희생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사전에서는 잡초를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불필요한 식물들’로 정의한다. 지극히 인간의 관점에서 본 해석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잡초란 아직 장점이 발견되지 않은 식물일 뿐이라고 했다. 나는 후자에 동의한다. 최고의 신데렐라 작물이라는 콩도 최고급 식물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다는 가치가 알려지기 훨씬 전에는 잡초로 불리었을 테니. 불쏘시개로 쓰이던 버드나무 껍질이 아스피린 약재가 되고, 발부리에 채는 질경이에서 신진대사 효능을 추출한 것도 오랜 일이 아니니 인디언 사회처럼 언젠가는 세상에서 ‘잡초’란 말은 없어질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살아오는 동안 내게도 여러 개의 경작지가 있었다. 의지로 또는 내 뜻과 상관없이 받은 땅이었다. 가정과 일터, 이웃과 크고 작은 공동체들……. 일구고 가꾸어야 했던 농지였다. 어느 땅에서나 풀은 무시로 돋았고 그때마다 뽑아버리고 싶어 애를 태웠다. 호미와 낫, 괭이를 들이댄 적도 있었다. 이제야 깨닫는다. 그 풀들도 건조하고 푸석거리는 일상에 필요한 물방울이 되고 거름이 되었음을. ‘잡초’라고 여겼던 시간 속에서도 키가 자라고 살이 여물고 어른이 되었으니까. 그러니 내 삶에서 쓸모없는 ‘잡초의 시간’ 이란 없었던 거다.
씻어둔 산야초에서 물기가 다 빠진 모양이다. 설핏 비춰든 햇살에 잎맥을 키워 낸 땅의 유전자들이 선명하다. 조심스레 풀을 들어 옹기 깊이 앉힌다. 잔뿌리 하나도 다 거두어야 하리라. 제자리를 지켜 낸 뿌리의 힘은 얼마나 놀라운가.
뽑아버리고 싶었던 ‘기억 속 잡초’의 뿌리들은 더 깊숙이 누이리라. 그 위에 내 생애 가장 깊은 산골짝을 떠돌던 바람 한 줌, 햇살 한 점, 구름 한 조각도 떠 넣으리라. 효소가 익을 무렵이면 내 마음밭에서도 향긋한 내음이 날까.
*가톨릭 신자들이 일상에서 고요한 곳으로 물러나 묵상과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살피는 일
<수필과 비평 202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