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꽁이 소리 / 강호형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논을 메워 지은 아파트다. 처음 입주했을 때는 주변이 논이었다. 이른 봄이면 그 논에서 개구리, 맹꽁이가 울었다. 개골개골 중구난방으로 요란하게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 속에 맹꽁이 소리가 끼어들어 맹꽁 맹꽁 장단을 맞췄다. 밤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려서 부르던 동요가 떠올랐다.
개골개골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밤새도록 하여도 듣는 이 없어/ 듣는 사람 없어도 밤이 새도록 /개골개골 개구리 노래를 한다. /개골개골 개구리 목청도 좋다.
10대에 고향에서 듣던 소리를 60대가 되어 타관에서 다시 들으며 그 시절의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오래 전에 세상 떠나신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버지가 그리워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시골이라고는 하지만 살기에 크게 불편한 게 없으면서도 이처럼 도회지에서는 꿈도 못 꿀 정취를 거저 누리는 셈이라 강남 사는 사람 안 부럽다고 허풍까지 떨며 살았다.
아파트에서 한 6‑7분 거리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나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차도를 따라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논틀을 가로질러 농로로 낸 둑길이다. 실속으로 따지자면 차도 쪽이 조금 가깝기는 하지만, 나는 고향 냄새 물씬한 둑길이 좋았다. 봄이면 우무 같은 개구리 알 무더기에서 올챙이가 나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모습이 신비롭고,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싱그러운 벼 포기들이 자라 누런 벼이삭으로 익어가는 모습이 좋았다. 이윽고 눈이 내리면 논바닥에 흘린 낱알을 찾아 떼 지어 내려앉는 참새 떼, 까치 떼들이 정겨웠다. 게다가 살벌하기 짝이 없는 철마의 위협이 없어 더 좋았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자 봄이 오면 개구리 소리는 여전한데 맹꽁이 소리가 뜸해졌다. 맹꽁이는 그만큼 환경에 민감한 동물이라고 한다. 서너 해가 더 지나는 동안 논 한 배미에 어린이집이 들어서자 맹꽁이 소리는 아예 사라지고 개구리소리도 세가 약해져서 봄밤의 정취가 예전 같지 않았다. 잇따라 도서관까지 들어서고 나니 논배미는 아직 남았는데도 개구리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개구리 올챙이가 없으니 귀족처럼 날아와 도도하게 논배미를 서성이던 백로도 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길 왼쪽 논 한 자락이 메워져 밭이 되었다. 외지 사람에게 팔렸다는 소문이었다. 밭 임자는 밭과 길 경계에 대추나무 몇 그루를 줄지어 심고 밭에는 콩, 오이, 파, 상추 등 철따라 여러 가지 작물을 심어 놓고 가끔씩 승용차를 몰고 와 텃밭처럼 가꿨다. 60대쯤으로 보이는 남자 혼자일 때도 있고 부인인 듯한 여인과 함께일 때도 있는데, 일손이 서툰 걸로 보아 농사꾼이 아니라 은퇴 후의 여가를 즐기는 부부 같았다.
대추나무가 첫 열매 몇 개를 맺더니 한 두 해가 더 지나자 훌쩍 자란 나무에 무더기로 주렁주렁 달려서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대견하게 쳐다보곤 했다. 그렇게 추석이 지나 대추알들이 다투어 붉은 기를 띠자 갑자기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경고판이 내걸린 것이다.
<허락 없이 대추 따면 고발, CC TV 녹화 중>
경고판을 보는 순간 기분이 몹시 상했다. 그 길을 자주 지나다니며 대추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건 사실이지만 훔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도둑으로 의심받는 것 같아 모욕당한 기분이었다. 제 물건 제가 간수하겠다는 데 할 말은 없지만 좋아 보이던 주인 내외의 모습이 이전과 달리 그악스러워 보였다. 요즘은 먹을 것이 너무 많아 풋대추 따위에 눈독 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차라리 선선하게,
<길가 쪽으로 열린 대추, 한 개씩만 따서 맛보세요.>
이런 팻말을 내걸었더라면 이웃 동네에 칭송이 자자했을 것이다. 주인도 멋쩍었던지 경고판을 없애기는 했지만 정나미는 이미 다 떨어진 후였다.
그렇게 또 몇 해가 지나 대추나무 바로 앞에 고등학교가 들어섰다. 나는 불현 듯 수박서리 자두서리 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시절의 어른들은 ‘서리’를 자라나는 개구쟁이 아이들이 의당 누려야 할 특권처럼 용납했다.
마침 신설 학교가 남녀공학이니 십대 남학생들의 그 원시 본능적 야성과, ‘꼰대’ 주인 사이에 대추를 두고 어떤 공방이 벌어질지가 자못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학생 녀석들이 나를 실망시켰다. 코앞에 주렁주렁 열린 그 탐스러운 대추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대추가 길바닥에 즐비하게 떨어져 짓밟혀도 주인마저 관심이 없어졌는지 아무도 줍는 사람이 없었다.
올해도 가지가 휘도록 대추가 달려 벌겋게 익었다. 본래 논이었던 그 자리에서는 개구리들이 요란하게 울면 맹꽁이 소리가 추임새처럼 끼어들어 장단을 맞췄었다. 이제는 그 맹꽁이가 멸종 위기 종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불현듯 맹꽁이 소리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