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꽃 / 김순경

 

거친 산등성이에 터를 잡았다. 물 한 방울 구경하기 힘든 척박한 능선에 자리를 틀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이면 돌산에도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다. 봄이 오면 푸른 잎을 내밀고 가을이 되면 깃털이 눈부신 하얀 꽃씨를 날려 보내 또 다른 세상을 만든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거미줄처럼 산길이 얽혀있다. 둘레길에는 명상을 즐길 수 있는 편백 숲이 있고 등산길에 들어서면 억새 군락지가 넓게 펼쳐진다. 무성하게 올라온 봄 억새가 쇠등같이 굽은 산등성을 푸르게 하고 여름이면 어김없이 갈색 이삭을 밀어 올린다. 학의 깃털처럼 부푼 억새꽃이 늦가을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간다.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왔다는 물가의 강선대降仙臺는 언제부턴가 공원이 되었다. 한때는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아 끓어오르는 열기를 발산하기도 했다. 갯내 나는 억새와 갈대밭을 헤집고 다니며 넘치는 열기를 식히고 토해냈다. 정의와 진리의 주장에 날이 저물고 자유를 들먹이며 목청을 높이다 보면 밤이 깊었다.

 

강어귀는 늘 분주하다. 아침저녁으로 색을 달리하는 노을이 장관을 이루는 하구에는 물고기들이 바다와 강을 넘나들고 새들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산과 들을 지나온 강물이 잠시 머뭇거리자 바닷물이 급하게 마중을 나온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강물이 모래톱을 지나면 넘실대는 파도가 흰 포말을 만든다. 붉은 노을이 물비늘에 잘게 부서지면 검은 산그늘도 금세 물속에 빠져든다.

 

능선의 억새도 갈대같이 서걱거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슷한 소리를 내지만 정착한 곳은 다르다. 같은 여러해살이풀이지만 억새는 산과 들에서 뿌리를 내리고 갈대는 바닷물이 들락거리는 강구에서 서로 얽어매고 의지한다. 어쩔 수 없이 해외로 입양되었던 형제처럼 이제는 남남이 되어 살아간다. 말과 글이 다르고 피부색도 다른 세상이지만 삶이 비슷하기에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억새는 억세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리배나 끊임없이 권력을 찾는 무리처럼 바람이 불기도 전에 엎드리거나 주저앉지 않는다. 가족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디는 가장과 같이 눈보라가 사선을 그리며 산등성이를 내리치는 겨울에도 휘청거릴 뿐 꺾이지는 않는다. 양지바르고 기름진 땅에서 밀려나도 자신의 영역을 떠나지 않고 억세게 자리를 지킨다. 죽어서도 마른 줄기를 꼿꼿하게 세운 채 새싹이 돋을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

 

어떤 가수는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라고 했다. 톱날같이 거친 잎이 부대끼며 내는 소리를 듣고 가을이 찾아온다고 한다.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던 푸른 시절이 지나가고 물기 없는 온몸이 붉게 물들면 소슬바람에도 마른 잎은 슬피 운다. 억새도 외로움을 탄다. 찬바람이나 눈보라 때문만은 아니다. 산꿩이 양지바른 산기슭을 찾아가고 쓰르라미마저 떠나가면 산을 찾는 사람들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유년시절 동네 할머니들을 따라 소 먹이러 다녔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높은 산에는 작은 분지가 있었다. 늙은 감나무 두 그루와 반쯤 썩은 돌배나무가 있는 것을 보면 예전에 누군가가 살았던 집터 같았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평지에는 누구도 쉽게 끼어들 수 없을 만큼 억새가 빼곡히 진을 치고 있었다. 이따금 풀벌레가 울고 바람이 불 때마다 긴 잎사귀가 일렁거리는 분지는 넓은 사색의 뜰이 되었다. 할머니들은 억새밭 너머 먼바다에 작은 배가 나타나면 사라질 때까지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릴 때 우리 집 아래채는 억새로 이엉을 엮었다. 억센 잎이 마르기 전에 이엉을 엮어야 부서지지 않고 모양이 잘 잡힌다. 깡마른 줄기는 어지간한 나무보다 단단하고 질겨 볏짚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볏짚은 쉽게 구할 수 있고 억세지 않아 다루기 쉬운 장점이 있지만 한 해도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빛이 바래고 풀이 죽어 여차하면 비가 샌다. 하지만 억새 지붕은 최소 십 년은 아무 걱정이 없을 정도로 썩지 않았다. 흙으로 구운 기와로 덮은 집보다 단열이 잘 돼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다.

 

억새꽃을 보면 어머니의 흰머리가 떠오른다. 자식을 위한 사랑과 희생이 흰머리로 나타난다. 한 해가 저물어 가면 억새는 하얀 꽃씨를 하늘 높이 날려 보낸다. 집 떠난 자식을 기다리는 어미처럼 차마 보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그리운 마음을 담아 자꾸 하늘로 날려 보낸다. 늦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무채색의 하얀 꽃이 잊고 살았던 고향의 동심을 불러온다.

 

억새꽃이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운다. 가부좌를 튼 수도자같이 밤낮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밤새 내린 찬 서리가 마른 잎마다 쌓이고 개구리가 겨울잠에 들어가도 꼿꼿한 자세를 풀지 않는다. 억새는 질곡의 세월을 견뎌낸 핏기 없는 몸뚱이를 흔들며 마지막 남은 씨앗을 떠나보낸다. 바람이 불고 눈비가 오는 세파 속에서도 꽃씨를 날려 보내는 대궁은 오직 자식을 지키며 살아온 강인한 모정이었다.

 

어떤 생명이든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려고 한다. 살기 좋은 곳에다 자신만의 유전자를 퍼뜨린다. 머리를 치켜들고 덤벼드는 칡넝쿨은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경쟁자를 휘감고 갈참나무같이 큰 활엽수는 하늘을 가려 질식하게 만든다. 먼저 자리 잡은 세력과 비집고 들어오려는 종족 간 소리 없는 전쟁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이기적인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려고 애를 쓰는 것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봄날 푸른 꿈을 가슴에 남겨둔 채 산은 어느새 은빛 물결이 되어 출렁인다. 강물이 석양에 붉게 물들면 억새꽃 물결도 쇳물이 되어 일렁인다. 쏟아지는 은하수를 바라보며 꿈을 키워가던 억새는 하얀 서리가 내리자 곡기 끊은 노인처럼 백발을 풀어 헤치고 꽃씨를 털어낸다. 땅을 지키라는 유언 같은 꽃씨를 해마다 바람결에 날려 보낸다.

<에세이포레 2021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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