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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슈바이처를 기리다

                                                양상훈

 

  알버트 슈바이처(1875Albert Schweitzer)의 일생과 업적은 지금도 역사적 의미로 깊게 새겨있다. 독일계 프랑스의사이며 음악가 철학자 신학자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겸손하고 동정심 많은 기특한 아이였다. 그런 그에게 의사가 없어 고통을 받는다는 아프리카소식을 접하고 심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 충격으로 슈바이처는 남은 생을 그들을 위해 살기로 하고 뒤늦게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의사가 된 그는 연인인 헬레나라가 다행히 간호사가 되어 결혼하여 함께 아프리카로 떠나게 되었다.

결국 슈바이처는 고국에서 편안한 삶을 버리고 현지의 고난의 길에서 90세까지 헌신적인 봉사를 하며 활동하였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것에서 나아가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 공로로 195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한 희생적 업적에 인류를 감동시켰고 그의 일생과 위대한 봉사정신에 숭모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그의 명언에서내안에 빛이 있으면 스스로 빛나는 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에서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를 남겼다.

  슈바이처의 정신을 이어받아 의료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오지에서 쓰러져가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한국의 슈바이처가 적지 않다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했던 이태석신부.사하라사막의 니제르에서 무더위와 전염병을 무릅쓰고 19년간 인술을 베풀었던 김대수 조규자 의사부부. 이영춘, 문장모, 김진우 ,안수현 및 장기려 박사 등 한국의 슈바이처로 회자되며 칭송되고 있다.

그 많은 의인들 중에 특별히 장기려 박사가 애잔하게 떠오르게 된다. 그는 민족분단의 6.25 동족상잔으로 희생된 이산가족이다. 북한에 가족(부인과5자녀)을 남긴 채 차남만 데리고 평양폭격에서 철수하는 국군과 함께 월남한 애환의 주인공이다.

그의 일생과 업적은 사랑과 인술의 한평생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베푼 사회봉사자 이었다. 평생 낮은 곳에서 청빈한 삶을 살아온 최고의 실력을 갖춘 외과 의사였다.

  장기려박사는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1936년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의대전신)를 졸업했다. 그 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백인제 교수의 지도를 받아 외과학에 입문.1936년까지 약270건의 실험에 바탕을 한 총수염 및 총수염성 복마염의 세균학적 연구논문으로 1940년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 이어 1947년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냈다. 김일성주석의 주치의로 활약하며 권위와 상당한대우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주석은 납치로 보고 그의 송환을 끈질기게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북한은 1993년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송환하면서 장기려박사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장기려박사는 아들 장가용박사에 이어 손자 장여구교수(인제대 서울백병원)3대에 의사 집안이다. 북한에서도 장기려박사의 가족은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큰아들은 인민군에서 의무장교로 상장까지 지냈고 큰딸은 식료품공장 총지배인, 작은 딸은 평양 암연구소연구원, 셋째아들 평양의대교수 등으로 활약했다. 북한에 남아있는 장기려박사의 손자21명 중 15명이 의사가 되었다. 김일성 주석이 아끼던 북한최고 외과의사의 운명은 한국전쟁과 함께 소용돌이가 되었다. 평양의대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던 중 장기려박사는 1950년 말 평양을 수복한 한국군과 유엔군에게 붙잡혀 야전병원에서 국군구급차에 실려 남하했다. 오직 차남과 함께 남하하자 서울의대 외과교수가 되었다. 19511월 부산 서구 안남동에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을 무료 진료하면서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인술을 베풀었다.

  이후 한국인에게 발병률이 높은 간암연구에 전념하여 1943년 한국최초로 간암환자의 간암덩어리를 간에서 때어내는 데 성공. 1959년 에는 간암환자의 간 대량절제수술에 성공하였다. 그의 간에 대한 연구와 수술은 우리나라 외과학의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 연구라 할 수 있다.

서울대 부산대 카톨릭대 등 여러 의과대학의 외과학 교수로 제직하여 남북한 의료인재 양성에도 공헌했다. 현재 대한간학회의 전신인한국간연구회의 창립(1981)에도 기여했다. 학문적 업적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8년 북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데 이어, 남한에서는 1960년 보건의 날 공로상과 1961년 대한의학협회 학술상(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또한 그가 간 대량절제수술에 성공한 1020일은 간의 날로 지정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그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외과 의사였지만 평생 낮은 곳에서 청빈할 삶을 살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베푼 사회 봉사자였다.1976년에는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여 의료복지사업, 취업알선, 장학사업, 탁아소 운영 등을 통해 장애인들도 건전한 사회 일원으로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는 등 일생동안 불우 이웃을 위해 몸소 사랑을 실천했다.

  1976년 한국최초의 사설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해 국내최초의 현행 의료보험제도의 효시를 탄생시켰다.

기독교 신앙에 기반 해 65년간 인술을 베풀며 봉사 박애 무소유를 몸소 실천했다.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자신의 돈으로 수술을 해주고 그마저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밤에 몰래 환자를 탈출시키기도 했다. 그는 평생 자기 집한 채 가지지 않고 병원 옥상 사택에서 살았다.

그는 1979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1979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으며 1995년 인도주의 실천 의사 상을 받았다.1996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헌액(獻額)되기도 했다.

이산가족으로서 50여 년 동안 북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을 잊지 못해수절한 그는 그의 간절한 재회소망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장박사가 이 땅에 남긴 사랑은 한없이 넓고 깊으며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임종하기 1년 전부터 당뇨병과 중풍으로 불편하면서도 매일 상오 부산 청십자병원에서 하루 10여명의 영세민 환자들을 돌봐왔다.

  장박사는 길에서 만난 거지에게 줄 돈이 없자 수표를 선 듯 건네주기도 했고 추운 방에서 자취하는 제자에게 며느리가 해온 이불을 주어 보내기도 했다. 장박사는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 한 분이었다. 75년 정년퇴임 후에도 집한 채가 없어 고신의료원 옥상에 마련해준 20여평 관사에서 노년을 보냈다.19951225일 성탄절 새벽에 향년 85세로 세상을 잠자듯 떠났다.

장박사가 걸어온 50년 세월은 모든 이산가족의 아픔이기도 했다. 그는 이산가족 만남 신청이 있을 때마다 항시 제 1번이었다. 정부의 특별 주선으로 우선적으로 재회의 특혜권유가 있었으나 거절하였다. 재혼하라는 주위의 수많은 권유에도우리의 사랑은 육체의 이별과 무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위해 혼자 산다고 말했다. 1988년 미국에 있는 조카를 통해

아내의 육성 녹음과 함께 서신으로 간접 상봉만을 했을 뿐 끝내 재회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장박사는 비문에 주를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는소박한 유언을 남겼다.

축복 속에 영원히 잠든 장기려박사. 그는 이 땅에 한없는 사랑을 남기고 간 참 인술로 한 평생을 일관해온 한국의 슈바이처이었다. 그의 사랑의 향기는 만인의 가슴에 짙게 스며있다.

늦게나마 다시 한 번 그분의 명복을 기원한다.

 

*헌액(獻額) 우수한 업적을 인정받아 명예로운 자리에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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