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처럼 메모 노트도 변한다

                                                                                                                                   이희숙

 

 

  

 

 

 

  병실에서 홀로 지내던 무료한 시간이었다. 골반 골절 수술 후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아무도 방문할 수 없었다. 혼자 견뎌야 하는 두려움으로 병실의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기에 곁에 있던 핸드폰이 유일한 친구가 되어 내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핸드폰 속의 '칼라 노트' 앱에 아프고 외로운 마음을 글로 옮겨 적기 시작했다. 눈만 뜨면 새벽이나 밤이든 개의치 않고 누워서 기록할 수 있어 나는 좁은 창에 몰두했다.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하고 점과 점을 잇듯이 단어를 연결하여 문장으로 엮어 표현했다. 완성된 문단을 수정하고 다듬어 색깔별로 글을 분류해 저장하면 한 편의 시와 수필이 탄생했다. 그 작업은 밝은 회복의 창을 열어주었다. 일 년을 지나 그 칼라 노트는 첫 시집 발간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준 도구가 되었다.

 

  기억의 페이지를 지난날로 넘겨보니 학창 시절에 빨강, 파랑, 형광 글자로 덧쓴 노트가 보인다. 수업 시간에 들은 내용을 필기한 다음 밑줄을 치고 강조하는 마크를 덧붙였다. 중요한 핵심은 별 한 개,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별 두 개, 시험에 나올 확률이 있으면 별 세 개를 그렸다. 크고 작은 글자, 울긋불긋한 색과 별표까지. 먹을거리 볼거리가 많은 전통시장의 진열대와 같은 모양새였다. 나만의 독특하고 효과적인 노하우로 생각해 열심을 기울였나 보다. 새로운 단어와 공식을 외우기 위해 내 책상 주변과 벽에는 형형색색의 종이들이 붙어 있었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암기하는데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해서였다.

 

 

  예쁜 공책에 일상에서 느낀 생각을 기록하고 남기곤 했다. 풋풋한 꿈들은 내 미숙한 언어의 숲에서 숨 쉬고 있었다. 그 숲에서 나는 작은 나무가 되어 내일을 향해 잎새를 파드득거렸다. 완성되지 못한 글은 지금도 습작과 배움의 숲에서 성장하고 있다.

 

청춘기에 간직한 수첩은 기다리던 데이트의 핑크빛 날짜들로 채워져 있었다. 설레던 숫자가 요즈음엔 병원에 가는 날짜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휠체어를 탄 할머니를 밀고 병원 문을 들어오는 노부부의 모습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세월의 탓인가 보다.

 

 

   딸을 출산했을 때 아기가 태어난 일시, 몸무게, 신장의 치수를 짧은 글과 함께 적어 앨범 속에 보관했다. 몇 달 후 옹알이를 시작하고 혼자 앉고 일어서서 처음 발걸음을 떼던 때의 기쁨을 버무려 담아 시집가는 딸에게 선물로 주었다. 딸은 친정엄마가 싸준 예단인 양 고이 간직하고 있다.

 

 

  성장하는 딸과의 소통 방법으로 포스트잇을 사용했다. 나는 일찍 출근하며 식탁 위에 '이것을 먹고 학교에 늦지 않게 가거라.'라고 애정을 표했다. 예나 지금이나 '밥을 먹었니?'라는 말은 엄마의 관심을 나타내는 표현 중의 하나이니까. 사춘기 딸이 엄마에 대한 불만을 포스트잇에 적어 내 방문 앞에 붙여 놓곤 했다. '엄마는 왜 나만 못하게 해요? 다른 친구들은 다 하는데...' 자신의 감정과 요구사항을 간단히 적는 포스트잇은 서로 다른 의견의 거리를 좁혀가는 대화 매체가 된 셈이었다. 이민 생활에 적응하느라 잠깐 소홀할 수 있었지만, 메모하는 습관은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주머니 속을 뒤집어 무언가를 찾는다. 빨래하기 전에 잊지 말고 해야 할 일이 있다. '아휴 참! 내 정신 좀 봐!' 세탁기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 괴상한 물체로 변한 종이 뭉텅이를 찾아내기가 일쑤이다. 깜박깜박 잊어버리는 실수를 막기 위해 쪽지에 메모해서 옷 주머니에 넣어두고 꺼내 보며 기억을 상기시키곤 한다. 나중에 보려고 잘 보관했는데 그 사실조차 잊고 메모가 들어있는 옷을 세탁기 속에 집어넣다니 아연실색할 일이다.

 

  은퇴하여 일을 놓은 후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해야 할 일은 무엇이지?' 한참 동안 생각해야 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정지하는 순간이 빈번해진다. 느려지는 내 몸의 기능에 반하여 시간은 예순 후반을 갑절의 속도로 내달리는 요즈음이다. 기억의 끈을 붙잡으려 고안한 방법인데 번번이 불발탄으로 끝나다니 난감하다. 모든 일정과 중요한 계획을 적어두지 않으면 불안하여 자다가도 깨어나 적는 것이 나의 습관이다.

 

  메모 노트 속에서 살아온 내 인생의 흐름을 읽는다. 기쁨과 슬픔, 만족과 고뇌의 흔적이 묻어 있는 언어를 찾는 듯하다. 어떤 길을 무슨 생각으로 걸어왔는지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큰 의미를 준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카카오스토리 앱과 밴드에 글과 사진을 보관하여 친구들과 공유한다. 잊지 않기 위해서 간략하게 요점을 글로 적는 메모의 범위를 넘어 남에게 전하고 공유하기 위해 업그레이드한 셈이다. 그곳은 남기기 위해 기록하는 곳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아이디어 기획의 장으로 변했다. 카카오스토리나 밴드에서 댓글을 통해 독자의 반응을 읽어 글쓰기에 반영하기 때문이다.

 

 

  칼라 노트를 통해 글을 창작하여 엮어내고 시집 출판이라는 성과를 이루었듯이 일상에서 반복되는 메모는 글쓰기의 요람이 된 셈이다. 발전하는 메모 노트의 새 매체 속에서 글을 같이 소유하여 느끼고 영향을 줄 수 있길 바란다. 내 나이가 익어가듯 메모 노트 방법도 성숙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