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발을 하면 보이는 세상

                                                                                                                     이희숙

 

 

아빠가 아이에게 묻는다. "다음 중 종류가 다른 것은? 금붕어, 고등어, 상어, 사자 중 무엇일까?" 네 가지 동물 중에서 관계가 없는 다른 것을 고르는 사지 선다형 문제다. 아빠는 네 가지 동물 중에서 물고기가 아닌 사자가 정답이라 했지만, 아이는 금붕어라고 고집한다. 이유는 그것이 예뻐서라고 한다. 아빠는 물속의 동물과 아닌 것을 범주로 삼았고, 아이는 예쁜 것과 예쁘지 않은 것으로 구분한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논쟁했지만, 끝내는 아빠가 복수정답을 인정하고 만다. 아이는 자신의 눈으로 '예쁘고, 예쁘지 않은 것'으로 세상을 나누었다. 네 살 된 손녀의 이야기다

 

아이의 아빠는 '정답을 정해놓고 그것을 요구하는 편협한 세상에서 살았는데, 이러한 태도를 우리 귀염둥이가 반성케 했다.'라고 말한다. 나 또한 정해진 카테고리에서 내가 원하는 답을 요구하며 산다. 정해진 잣대로 옳고 그른 답으로 채점하면서. 정답은 하나일까? 아니 여러 개일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지 선다형 문제에서 하나의 정답에 익숙해 있음을 인정한다. 우린 스스로 전통과 관습, 규례라는 짜놓은 굴레에 맞추어 살아간다. 손녀의 견해를 통해 나도 이제 생각의 폭을 넓히고 높여야 함을 깨닫는다. 범주 안의 특징적 요소들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발견하는 창의적인 눈이 필요하다.

 

  우습게도 내 키가 작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젊은 날엔 높은 굽의 하이힐을 신었지만, 이젠 굽이 없는 편한 신발만 신어서인지 새삼스럽게 발견한 사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손자는 나에게 다가와 키를 재며 우쭐댄다. 그의 뻗친 팔 아래 내가 서 있기에 나는 웃으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키가 작다는 불편함을 모르고 여태까지 살았는데, 나이가 드니 키가 줄었는지 물건을 내리고 올릴 때 사다리나 발판이 필요하다. 심지어 빨래를 워시어 washier에서 드라이어 drier로 옮길 때 손이 닿지 않아 까치발을 하고 또 집게를 사용해야 한다. 내 눈높이에서만 창밖을, 세상을 내다보며 살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난여름 가족 캠핑을 하러 갔을 때다. 아침에 산속의 캐빈에서 창문을 열었. 신선한 바람이 마음을 열어주며 눈앞에 푸른 나무가 보였다. '나무밖에? 다른 것은 없나?' 밖이 궁금해 의자를 놓고 올라가 고개를 쭈욱 빼니 침엽수 숲이 가려졌던 전신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숲을 보지 못한 채 나무만 보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뭇가지에 깃든 예쁜 부리를 가진 새가 지저귀고 곁을 둘러보니 너른 초원에 이름 모를 풀꽃이 펼쳐져 있는 것을. 초록빛으로 장식한 자연의 정원을 가로질러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경쾌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물소리는 잔잔한 파문을 일렁이며 하늘에 닿는 듯 울림을 주고, 푸른 하늘에 구름은 자신의 성을 만들며 떠 있었다.

 

넓은 세상이 다양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펼쳐져 있었다. 나는 작은 창만큼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다. 짜인 테두리 안에서 창 너머로 다른 세계가 있음을 모른 채 살아왔음을. 미처 관심을 두지 못하고 좁은 시야 속에서 주어진 일에만 성실하리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마음의 까치발을 들면 숨겨진 세상이 보인다. 조금 관심을 높이고 넓히면 보이지 않던 것이 시야로 들어온다. 멀리 보려면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하늘의 눈으로 보면 지구의 구석구석이 보이듯이. 구석진 곳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미처 인식하지 못한 소외계층이 보인다. 구태여 몰라도 되는 세상이라고 외면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를 사람들이다. 도우며 함께 하길 꺼리진 않았는지 되돌려 짚어본다.

 

어느 시인은 "세상이 덜 아팠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나 아프다."고 말할 때

"너 아프니? 많이 아프겠구나!"

"내 마음도 너처럼 아프단다."라고 그의 아픔을 들으며 같이 나누고 만져주면 족하지 않을까. 한마음으로 공감할 때 아픔을 덜어 줄 수 있으리라.

 

다른 사람의 글을 읽으며 그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을 본다. 내게 새로운 시야의 창구가 생긴다. 글의 세계를 통해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나눌 수 있기에 내 마음의 창은 넓어진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접하지 못한 세상을 경험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오늘도 글쓰기에 정진한다.

 

  조금만 마음의 발꿈치를 들어보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