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게 묻다 / 이경은
“너는 누구니?”
“나도 몰라.”
“뭘 생각해?”
“알 수 없는 그 무엇.”
벽에게 묻다.
방 한가운데 누워 몸을 돌리면 사방이 벽이다. 어느 날부터 벽이 말을 걸기 시작하고, 내가 대답을 한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 여름이 너무 뜨겁거나 너무 심심해서 내가 먼저 벽에게 말을 걸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정신이 아득하고 몽롱해져도 사람은 솔직해야 한다. 자기한테까지 가면을 쓰기 시작하면 갈 곳은 단 한군데뿐이다.
정신과 정신을 놓음의 경계는 단지 한 발자국의 간격. 가끔 그 경계를 슬쩍 넘어갔다 넘어 오는 듯싶은 날엔 온 등줄기가 서늘하다. 아슬아슬해서 온 몸에 소름이 돋고, 한기(寒氣)가 손톱 밑까지 스며들어와 종내는 자리에 눕고 만다. 정신의 방황에 대한 육신의 굴종, 유희, 반항, 가벼운 위로, 한 몸에 기거하는 동료의식의 발로, 이겨내고자 하는 본능적 자유의지 등의 낱말들을 끄집어내어 방안 가득히 펼쳐놓는다. 차라리 물을 더 부어버리고 잠수해 버릴까. 아니면 푸른 풀밭 위의 빨래 줄에 나란히 널어 보송보송 바짝 말려볼까. 그러면 내 몸에 가득한 이 습기가 다 걷어 내질까. 한참을 들여다보다, 뒤돌아 눕는다.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아, 시시하고 지루한 놀이.
나이 80에 23층 아파트에서 이 순간에도 당장 뛰어내리고 싶다던 노수필가가 있었다. 처음엔 의아했고 놀랐다. 아니 아직 저 나이에도 저런 격정이 남아 있다니, 그런데 왠지 그 기막힌 순간에 나는 실실 웃음이 나왔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이 분은 우리 시대의 자타공인 선비수필가이신데….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말이 가슴 밑바닥에 뭉글뭉글하니 남았다. 오랜 뒤에 도대체 왜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냐고 물어볼 걸, 싶을 때가 가끔 있었다. 그 앞뒤를 미리 알아두었더라면 조금은 편했을까.
나는 이제 조금 이해할 것 같다. 그런 마음은 십대나 오십대나 팔십대나 아무 상관없다. 사람으로 태어나 살기 시작하면 크든 작든, 얕든 깊든 누구나 겪는 일이다. 다만 굳이 말하자면 헤어 나오느냐 못 헤어 나오느냐의 차이이다. 우리는 그럴 때 스스로를 본능적으로 방어하고 싶은지 모른다. 자기 내부에서 솟아나오는 그 죽음 같은 열정의 열기에 온 몸이 데일까, 혹 지독한 화상을 입어 영원히 흉한 괴물로 남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면서 말을 건넨다. 나를 모르거나 아는 모든 사람들, 세상의 모든 자연과 사물들에게 소리친다.
“….”
나는 아직 이 땅에 있을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세상에 태어난 수많은 이들이, 그 길 위에서 흔들리는 것은 평범한 삶의 궤도이다. 누구 하나에게만 특별히 일어나는 게 아니다. 하나 아무리 번지르르하게 혀를 내돌려도 나를 일으켜 세우지는 못한다. 맥이 빠지고 어지럽다. 방바닥에 얼굴을 붙이고 하루 종일 누워 있다.
사방이 막힌 벽이다. 아니 벽은 없다. 그저 내 마음의 벽이고, 두 눈이 만들어 낸 이미지일 것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안과 밖이라 말하고, 스스로의 경계선에 마음을 매달고, 애달파한다. 우주 저편에서 보면 안으로 들어간 것도 밖으로 나간 것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천지가 엄연하게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숨쉬는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벽을 넘으면 어느 날 그 벽이 제 설움에 겨워 절로 무너져 내려 앉으면, 그 밖에 넓디넓은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다고 누군가가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두말없이 선선히 따라가 그 위에 누워 사방이 훤히 트인 푸른 하늘을 며칠이고 바라보리라. 그리고는 두 눈을 감고 기도하리라. 저 하늘이 내 두 눈으로 들어와 몸을 온통 물들이기를, 초원의 공기가 내 폐부로 들어와 핏줄기를 새로이 순환시키기를….
벽이 일어나 다가온다.
“너는 너 나는 벽.”
“그 뿐이야?”
“을.”
“너무 간단한 거 아냐?”
“복잡해도 별 것 없어.”
벽이 말하며 웃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 둘은 친구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