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층 계단의 말 / 이경은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진다.
'아, 오늘 낮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을 때, 내가 이렇게 대답해야 했는데. 바보같이 겨우 그런 어리숙한 대꾸를 하다니. 그리고 왜 또 그렇게 버벅거렸는지…. 도대체 그 많은 말들은 다 어딜 간 거야?"
나는 밤새 이렇게 말해보고, 저렇게 말을 가져다 이어대었다. 깔끔하고 멋지게 응수를 할 수 있었는데, 하고 생각하니 잠은 점점 더 사라져갔다.
그런 날은 밤을 하얗게 새었다.
어려서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이런 일들이 많았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특히 언쟁을 벌이거나 토론을 할 때에 가슴속의 말을 제대로 못해 답답했다. 어떤 사람은 말이 느려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말이 빨라 그럴 때가 많았다. 가슴속의 말을 한꺼번에 다 쏟자니 자연히 감정이 넘쳐 말을 제대로 표현을 못 하는 것이다. 감정의 속도와 말로 표출되는 속도가 늘 맞질 않아, 우습게도 말이 빠른데 늘 더듬거렸다.
어쩌면 내가 글을 쓰게 된 것은 이런 불면의 밤들이 있어서인지 모른다. 알고 있는 어휘들을 모조리 끌어다가 최고의 표현과 묘사로, 그 상황에 절대적으로 딱 들어맞는 문장들을 밤새 고르고 고르다 보니 저절로 기본적인 문장 수련이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때로 단 한 줄의 명답이 떠올랐을 때의 기쁨이란 가슴을 벅차게 하고, 정수리부터 등허리를 타고 내려가는 찌릿함이 있었다. 이런 기분은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로 느껴지는 감정이다.
이디시어 Yddish 語의 말에 '트랩 베르테르 Trepverter'라는 게 있다. '아래층 계단의 말', 상대방의 말을 멋지게 되받아 칠 수 있는 말이지만, 꼭 뒤돌아선 뒤에야 떠오르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기막히게 통쾌한 말들이 떠오르는 것. 상대방을 멋지게 꼬집어 줄 수 있는 말들은 늘 한 템포를 지나 맨 아래층 계단에 발을 디딜 때 떠오르는 법이라고 하니 야속하기 그지없는 낱말이다.
맨 아래층 계단에 발을 디딜 때에야 떠오르다니…. 다시 올라가 봐야 상대방은 이미 사라져 버렸을 테고, 자기만 혼자 얼굴이 붉어지다가 말아야 하는 허무함에 맥이 빠질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 아쉬움과 속상함이란 말로 표현키 어렵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도 없으니,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어려서 참으로 열등의식이 많은 아이였다. 몸도 약하고, 공부도 시원찮고, 항상 무엇이든 더디 깨우쳤다. 곁에 가까이 살던 친척 중에 혜옥 언니라고 있었는데, 어찌나 모든 걸 씩씩하고 용감하게 잘 해내는지 늘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부는 물론 아는 것도 많고 손 솜씨도 좋아 공작 시간의 숙제는 늘 1등을 맡아 놨다. 게다가 노래까지 잘해 나는 그 언니 앞에 서면 목소리가 잘 나오질 않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아, 저 언니는 입이 커서 말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 모양이다. 아마 커서 분명히 유명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그저 옆에 붙어 다녔다. 나도 그때 좀 부러워해서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내가 잘하는 것은 무얼까' 하는 적극적인 생각을 가졌으면 좋았으련만, 어린 마음에도 아예 상대가 안 되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히 따라가지 못할 거라는 열등의식이 강하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린 시절 별생각 없이 뭔지 모르게 멍하니 시간만 흘려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혼돈의 시간 속을 마냥 걷기만 했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이런 모자람이나 한발 늦은 더딤도 괜찮은 것 같다. 나는 늘 부족한 아이였고 뭘 그리 잘하는 게 없었기에,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나중에라도 모자란 부분을 채울 욕망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시작한 뒤늦은 공부들은 어려서 하는 무작정의 공부보다는 더 소중함과 가치를 느끼게 해주었고, 자칫 시들해질 중년의 시간들을 가슴 뿌듯함으로 채워주었다. 열정은 젊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우리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몰입하여 그 일에 미치거나[狂] 미칠 때[及] 생겨나는 형태인 것이다
오래전 한겨울 낙산사 바닷가, 하얀 눈꽃들이 광풍으로 포효하는 거대한 바닷속으로 속절없이 빠져 들어가는 폭풍의 거친 숨결 앞에서,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온몸은 차가운 추위로 얼어붙을 지경이었지만 심장은 불덩어리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의 뒷모습처럼 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를 바라보는 인간의 뒷모습- 이 그림은 스스로를 세상 한가운데에서 방향을 잃은 고독한 인간, 세상 끝에 홀로 선 인간, 무력한 인간을 형상화했다는 평을 받는다. 물론 이는 화가의 고통스러운 일생과 자기 가족들의 어이없는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겠지만, 나는 이 그림 속에서 '생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느꼈다. 죽음이 너무 가깝게 있기에 오히려 저 소용돌이치는 바다 앞에서 뜨겁고 열정적인 생명력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속초의 그 겨울 바닷가에서 내가 영혼의 떨림, 열정이라 부르고 싶은 것을 찾아내었듯이….
만약 어린 시절 상대방에게 아주 알맞은 말을 찾아내 되받아쳐냈다면 친구 사이는 영원히 깨졌을지도 모르고, 나는 그 순간의 득의양양함으로 세상을 우습게 눈을 내리깔고 보는 오만함으로 가득한 인간으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결핍과 열등, 뜨거운 눈물을 모르는 인간이란 얼마나 차가운가. 그 서늘한 차가움에 세상은 종종 영원히 녹지 않는 빙하의 세계로 들어가곤 한다. 어쩌면 계단 하나 아래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 얼음은 녹아내릴지도 모른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한 발짝 늦은 아래층 계단의 말이어서 좋았던 적도 많았다. 그대로 바로 내뱉지 않고 말을 삼키고 집으로 돌아오니 참는 습관이나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는 버릇이 생겨났다. 내가 좀 바보 같기는 했지만, 적절한 말이 생각 안 난 덕에 순간의 감정들에 휩싸이지 않게 되었고, 말을 골라 쓰는 현명함도 좀 배우게 되었다. 게다가 의도하지 않게 결과적으로 상대방을 치켜세워 주는 격이 되었으니 평온한 세상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더 나은 말을 했다고 으스댈 것도, 모자란다고 아쉬워할 것도 없다. 시간의 긴 흐름 속에서 보면 앞과 뒤의 한 걸음 차이요,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손안의 모래 알갱이들이다.
한정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시간이란 참으로 소중하다. 괜한 감정에 사로잡혀 괴로워했던 저편의 시간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지금 내 곁엔 나와 인연을 맺으며 살아온 사람들만이 선명하게 곁에 남아 있다. 아래층 한 계단에 내려가서 말하듯이, 마음을 한 칸 내려놓으면 이 세상이 다사로워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