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인간의 환경을 비추는 거울이다.
최상의 언어를 찾아 문학인은 방황하고 고뇌한다. 내재된 언어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잉태된 것인지, 학습된 것인지, 완벽한 언어는 존재하는지, 수천 년 동안 변형된 언어의 원형은 어디에 있는지, 의문이 꼬리를 문다. 이 의문은 모든 환경과 조건이 완벽했던 에덴에서는 어떤 언어가 있었는가로 이어진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창세기에 쓰여 있는 최초의 언어가 탄생되는 장면이다.
아담에 의해 탄생한 언어는 자신 앞에 있는 생물의 이름이었다. 성서 학자들은 이 장면에서 언어학적 가설을 끌어냈다. 아담이 사물에게 부여한 특정한 이름은 '누구라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가장 적합안 이름'이고 동시에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는 기호체계라는 것이다.
아담의 예지적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고, 그 능력으로 지은 이름은 사물의 근원적 속성을 전달하는 명료한 '자연 언어'로 만들어졌다. 자연 언어란, 이름 속에 자신의 본질을 포현하고 드러내는 언어이고 이 최초의 언어에는 절대적 순수가 있다.
그러나 에덴을 떠난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며 바벨탑을 세운 후 우리는 혼돈된 바벨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더 이상 이간은 자연언어인 한 가지 언어로 우주의 창조물을 완벽하게 표현 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이 스스로 깨닫고자 하는 지적 욕망의 바벨탑이 높아 갈수록 혼도은 깊어지고 순수는 멀어졌다.
타락한 바벨의 언어 속에 남아 있는 '아담의 언어'가 남긴 흔적은 미메시스 된 언어들이다.
학자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 미메시스는 모방이라는 뜻이나, 단순한 모방이 아니고 예술에서는 표현의 의미로도 쓰인다. 벤야민은 인간의 미메시스 능력이, 시간이 흐르면서 언어 능력이나 창조 능력에 대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직관과 상상력에 작용하는 능력으로 보았다.
어느 미학자는 미메시스를, 한 유명배우가 미국 연기스쿨 위크숍에서 경함한 일로 설명했다. 파도를 연기하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 배우는 단순 모방인 손으로 파도를 출렁거리는 모습을 그렸는데 다른 외국 학생은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부딪치는 모습을 온몸을 비틀며 연기를 했다. 이 두 배우의 표현으로 보면, 미메시스는 파도모양을 단순 모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파도 자체가 되어 표현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언어를 익히고 경험하는 과정도 미메시스적 특징을 보여준다.
남편의 유학시절, 우리가 타고 다닌 차는 15년이 넘은 낡은 차였다. 엔진 소리는 둔탁하고 차 표면은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어느 날 세 살짜리 딸아이와 함께 공원에 가던 중, 네거리에서 방향지시등을 켰다. 뒤에 조용히 앉아 있던 아이가 갑자기 "치컥, 치컥, 치이컥" 하는 소리를 냈다. 놀라서 돌아보며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차안에서 깜빡이는 방향지시등을 가리킨다. 아이가 말한 "치컥"이란 의성어는 차의 낡은 정도를 한미디로 드러냈고, 그즈음 우리 집 경제 상태도 표현된 소리였다. 어른이 사용하는 일상 언어로는 장황하게 설명해야 하는 것을 아이는 깜박이에서 나는 소리로 단숨에 모든 상황을 전달했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지각知覺한 미메시스적 언어였다.
미메시스는 충돌이고 만남이다. 가장 충만하고 순수한 순간 미메시스는 찾아온다.
사물을 보았을 때 느끼는 직감이 이성의 회로를 따라가 만나는 섬광 같은 순간이다. 그 짧은 순간 아담의 유전자는 빛을 내지만 불꽃의 순간은 연속 될 수 없다. 섬광이 이어져 불길이 되면 그 작가는 산화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바벨의 언어로 미메시스 된 작품을 지향한다는 것부터 맨발로 가시밭을 걷는 일이다.
아담의 언어가 있는 곳 - 에덴과 어린아이의 세계로 돌아 갈 수가 없다.
아담의 언어 파편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곳은 상상의 세계이다. 상상 속에서 선악과를 베물어 보기도 하고 유혹하는 뱀의 꼬리를 밟아본다. 두 무릎을 꿇게 하는 현실을 상상으로 우롱하며 훨훨 날아 본다. 그러나 두발은 꿋꿋하게 대지를 딛고 걸어야만 한다. 그곳이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의 모래 위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찬란한 오로라를 볼 수도 있다. 상상의 힘으로 무채색 같은 현실에 색을 입힌다. 글을 쓴다는 것은 흑백과 컬러 사이를 오가는 작업이다.
혼돈 속에서 허상의 오로라를 만나면 실재의 오아시스도 머지않다. 그 순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