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쉬는 날이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온 옷장정리를  오늘은 반드시 하기로 마음먹었다. 수년간 쌓아 놓았던 옷이 너무도 많아 옷장을 쳐다보기만 해도 머리가 복잡해지며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이제 더는 방치할 수 없다. 

 

아침 요가 수업 후 바로 다시 방으로 돌아와 옷장에 걸려있던 옷을 모조리 꺼내어 구분해 보았다.  티셔츠, 와이셔츠, 스웨터, 조끼, 재킷, 바지, 치마, 운동복, 코트 등의 옷 무더기 속에서 다시 하나씩 들어내어 결정을 내린다.

 

옷 대부분은 내가 언제 어디서 산 것들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나잇살이 불어난 몸에 더는 잘 맞지 않아 불편하다.  그래서 수년을 입지 못한 채 내버려 두지 않았던가.

 

갭(Gap) 매장에서 산 연회색 재킷 -  10여년  전 빠듯한 주머니 사정이었지만 큰맘 먹고 사던 기억에 아직도  마음이 조려온다. 부드러운 고급 면 소재로 박음질이 밖으로 되어있는 자유로운 느낌의 포근한 재킷, 이런 옷을 난 아직도 사랑한다. 연갈색의 순모 카디건 - 이건  돌아가신 친정엄마와 생시 함께 즐겨 찾던 '바나나 리퍼블릭'에서 엄마가 나의 출근복으로 입으라며 사주신 것이다. 그리고 레이스가 달린  연미색 블라우스 -  오래 해 전, 새 학기를 맞은 내 아이들에게 새 옷을 사주려고 가족과 함께 나들이겸 카마리오 아웃렛에 갔다가 나도  덩달아 명품 하나 사 입어보던 추억이 새롭다.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계절이 돌아오면 다시 입을 수 있을 것 같은 옷들은 비닐 커버를 씌워 옷장 한편에 걸거나 잘 개어 빈 여행용 트렁크에 넣어 두었다. 평생 유행을  모르고 사는 터라 아직 몸에 맞으면 합격이다. 부담 없이 걸칠 수 있는 다양한 재킷 종류를 좋아하여 어디서든 입어 보고 몸에 맞으면 즉흥적으로 사들이던 충동적 구매 습성을 반성하였다.  유튜버 '논나' 할머니처럼 이제 옷을 그만 사야겠다는 결심도 해본다. 기부할 옷들은 곱게 개어 봉지에 차곡차곡 담아 넣었다. 

 

오후의 햇살이 눈 부시다.  동네 구세군  센터에 가서 나의 분신 같은 옷 다섯 봉지를 맡겼다.  중고품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이 다가와 영수증과 함께 센터 할인 쿠폰도 주었다. 나의 옷들이 거기 진열이 되거나 혹은 팔려나가 누군가를 따뜻하게 해줄 상상을 해보았다. 

 

그곳을 나와  트레이더죠에 들러 집에 떨어진 몇 가지 먹거리를 샀다.  샐러드 거리와 과일 주스, 아이스크림도 사고 작은 화초와 함께 오늘의 일을 자축하기로 한다. 

 

집에 돌아온 후,  현관에 놓여 있던 빈 화분에 아까 사 온 작은 고무나무 묘목을 심었다. 이것도 오래 미뤄두었던 일 중 하나이다.  작은 나무가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어져 받침대로 고정해주고 물을 듬뿍 주었다.  아이를 달래듯 잘 자라 달라고 부탁하며. 

 

다시 방으로 들어와 창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앉는다.  한 바탕  난장판을 치른 후, 이제 한결 차분한 느낌이 든다. 과거의 시간이 사라진 자리에 고요한 기쁨이 찾아와 서성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