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대가족 / 유병숙
소나무 우듬지가 바람결에 춤추고 있다. 노송 아래 어린 소나무들이 어미를 닮아 제법 의젓한 모양새들이다. 볼 때마다 기특하고 흐뭇하지만 그때 일을 떠올리면 만감이 교차한다.
“집에 불이 났으니 빨리 오시게!”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한 이는 비구니 스님이었다. 모임에 참석 중이던 나는 옷도 제대로 꿰지 못하고 차를 몰았다. 골목에 꽉 들어찬 소방차들이 가슴을 후들거리게 했다.
마당은 아수라장이었다. 양동이를 손에 든 스님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나를 반겼다. 소방관은 담 너머 밭 주인이 병충해를 없애려고 놓은 불씨가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산불로 번졌다고 했다. 마당까지 쳐들어온 화마에 나무들이며 잔디밭이 새까맣게 타버렸고 탄내가 진동했다.
불을 처음 발견한 이는 이웃한 절에 계신 스님이었다. 매캐한 연기에 밖으로 나와 보니 시뻘건 불길이 어느 순간 우리 집 쪽을 향하고 있더란다. “119에 신고했지만, 마음은 급한데 소방차가 세상 와야지, 나도 모르게 달려가 막 물을 길어다 부었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겠단다. 그 말씀이 마음을 울렸다. 덕분에 안채로 번지려는 불을 가까스로 잡을 수 있었다. 스님은 멍하니 서 있는 나를 툭, 치며 마당 끝 소나무를 가리켰다.
아차! 아름드리 노송이 시꺼멓게 그을려 있는 게 아닌가! 곡선으로 휘어져 벋어나가던 가지도 그만 부지깽이 끝처럼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달려가 나무를 끌어안았다.
처음 노송을 만난 건 시댁에 인사 왔을 때였다.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마당 끝에 우람한 소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낭창낭창한 솔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마치 내게 첫인사를 보내는 듯했다.
연탄을 가는 일은 온전히 며느리의 몫이어서 나는 새벽마다 방을 돌아다니며 무려 11장을 갈아야 했다. 일을 마치고 나면 어느새 어둠은 옷을 벗고 소나무 가지 사이로 북악산 붉은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붉게 타오르는 노송은 내게 무언의 위로를 보내는 듯했다.
시집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되어 갈 무렵 친구들이 방문을 했다. 좁고 꾸불거리는 길을 오르며 투덜거리던 그녀들은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일제히 소나무로 시선을 보냈다. “인제 보니 너 소나무 부자구나!”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소나무를 탐내며 다투어 사진을 찍었다. 고옥(古屋)은 소나무의 후광을 입고 있었다. 그 후 친구들은 소나무의 안부를 챙겼고, 서울 성곽이나, 북악스카이웨이를 지날 때면 거기서도 우리 집과 소나무가 보인다며 전화를 하거나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소나무는 나와 각별한 사이였다. 말 못 할 사연이 생길 때마다 몰래 이 나무를 찾곤 했다. 속내를 털어놓고 눈물을 찍어내며 위로를 청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소나무와 나는 석가모니와 가십처럼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다.
소나무는 엄밀히 말해 우리 소유가 아니었다. 소나무 줄기의 윗부분과 가지의 대부분은 우리 집 마당 안으로 뻗어있지만 뿌리는 아랫집 뒤뜰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 나무가 우리 집 소나무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불을 먹은 나무는 고사한다고 했다. 아랫집은 주인이 자주 바뀌곤 했다. 요 근래 이사 온 주인과는 아직 일면식이 없었다. 그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외지로 나가 집이 비어있었다. 소나무를 살리는데 막걸리가 약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담 너머로 틈날 때마다 막걸리를 부어주었다.
어느 날 불에 탄 나뭇가지들이 우리 집 마당에 툭툭, 떨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무의 소생을 더는 믿지 않기로 했다. 노송의 극락왕생을 빌어야 했다.
다음 해 봄, 마당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신기하게도 바위 곳곳에 소나무들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전에 없는 일이라 애지중지하게 되었다. 하나, 둘 늘어난 새싹은 어느새 열 그루를 넘어섰다. 바위에 자리 잡았는데도 쑥쑥 잘도 자랐다. 그런데 더욱더 놀라운 일은 불에 타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어미 소나무가 기적같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까닭 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생명을 이어가려는 자연의 섭리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졸지에 우리 집은 소나무 대가족이 되었다.
어미 소나무가 아기 소나무들을 굽어보고 있다. 어미에게 화답하듯 아기 소나무에서 손가락 같은 새 가지들이 뻗어 나왔다. 가지들이 엉켜있어 가지치기 해 준다. 어미가 지켜보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성글어진 가지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마당 가득 초록이 넘실거린다. 나는 자연이 준 축복에 감사한다.
언제 왔는지 남편이 바위께로 다가선다. 암 투병 중인 그의 등이 앙상하다. 남편은 어린 소나무들을 쓰다듬다 어미 소나무를 올려다본다. 그도 나무도 어쩌면 견디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어미 소나무는 가지마다 새잎을 틔우고 있다. 소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는 남편의 눈 속에 반짝, 이슬이 맺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