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키스

박진희

 

 햇살이 연두색 잎사귀를 헤치고 꽃내음이 가득한 아카시아 숲. 그의 손길이 닿고 얼굴이 다가오자 세상이 멈춘 듯 숨이 막혀온다. 순식간에 내 머리 속의 산소가 그의 입술로 빨려 들어가며 온몸이 휘청거린다. 하늘, 나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만 사방에서 진동하는 아카시아향이 아득한 황홀함에 진한 여운을 더할 뿐이다.

 2년 이상을 알고 지냈지만 변변한 데이트도 없이 어느 날 그렇게 갑자기 청혼을 해왔다. 스물세 살의 나는 결혼에 관심이 없어 거절했지만, 그날의 첫 키스는 인생의 새로운 쟝르를 만들어주었다. 사춘기 시절부터 키스에 대한 호기심이 얼마나 컸던가. 연애 소설을 읽을 때나 외국 영화를 볼 때마다 고대하던 키스신을 얼마나 설레었던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마주치는 것도 감당하기 힘들텐데, 눈은 차라리 감는게 낫겠지. 입술이 닫기 전 코가 먼저 닿으면 어떡하지. 서로의 얼굴 각도가 엇갈리며 다가오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그토록 상상으로만 수백번 하던 키스를 실제로 처음 하게 되었던 순간, 온몸이 흐늘흐늘 녹아버리는 듯했다. 모터싸이클로 스피드를 즐기던 키 크고 귀여운 그 남자와의 키스. 그 후 많은 날들, 그 순간을 되새기곤 했다. 그를 떠나보내고 1년 후, 소개로 만난 스피드를 전혀 즐기지 않는 남자와 두 달 만에 결혼했다. 사랑이 피기도 전에, 한 해 전의 숨 막히던 키스가 그리워서 였을까.

 

 처음 프랑스를 여행할 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양 볼을 스치며 "봉주르! 쪽"하고 키스하는 듯한 특유의 인사법에 그들과 금방 가까워진 착각이 들었다. 분명 처음 만났고 말이 잘 통하지 않는데도 방어벽에 무너지며, 기분 좋게 들뜨곤 했다. 그런 인사는 나이가 들어도 절대로 지치지 않을 것 같다. 이천년 유월의 어느 날, 영국 축구팀이 라이벌 독일을 이긴 후에, 런던 거리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기쁨에 들뜬 한 영국 청년이 다가와 내 뺨에 키스를 하고 유유하게 사라졌다. 불쾌하거나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던 승리의 환희를, 마침 거리를 지나던 나에게 표현한 것에 아무런 거부반응이 일지 않았다. 그가 사라진 트라팔가 광장에는 수백 명이 흥겨운 춤과 노래로 자축하고 있었다. 인파 속의 나도 설렘과 흥분에 가득 차서 한국인 유부녀라는 사실도 잊은 채 한참을 그들과 함께했다.

 프랑스와 영국 여행에서 나눈 가벼운 키스로 젊음의 기운을 충전한 나에게, 남편은 매일 아침 출근 전에 키스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냥 입술만 살짝 대고 6초간 있으면 도파민, 옥시토신, 그리고 세로토닌 호르몬이 출동을 해서 기분이 좋아지고 하루가 싱그럽다는 기사를 어디서 읽었다고 한다. 한번 실험을 해보자고 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이듬해에 늦둥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키스의 효과가 생각보다 훨씬 컸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 언제 우리가 잉꼬처럼 입 맞추며 살았나 싶게 다 잊고 산다.

 

 클림트의 명작 <The Kiss>를 떠올려본다. 두 발로 서 있기엔 그 사랑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던 걸까. 꽃무늬 드레스, 붉은 금발을 꽃으로 치장한 그녀는 곱게 무릎을 꿇은 모습이다. 키스하는 남자의 눈조차 바라볼 수 없고 새로운 감각의 세계 속으로 빠져드는 듯 사르르 눈을 감는다. 여자의 손가락은 현란한 리듬의 악기를 타는 듯하다. 남자는 여자가 기대도록 몸을 낮추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수줍어하는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그들이 걸친 금박이 의상은 가장 값진 사랑의 언어다. 사랑의 몸짓은 막 터뜨리기 시작한 꽃봉오리 같아서 짙은 향이 가득해 보인다. 무엇보다 그녀의 볼그스레한 볼, 나른해 보이는 키스, 무아지경이 남자가 걸친 옷에 보일 듯 말 듯하다. 연인의 숨 막히는 에로티시즘을 영원히 새겨두고 싶은 화가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몇 년 전부터 미국 친구들이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본다며 말을 건넨다. 한 친구는 도대체 주인공들이 언제쯤 키스를 하는지 기다리다 보면 시리즈를 매번 거의 다 보게 된다고 한다. 미국 드라마는 키스를 지체하지 않고, 키스에서 대부분 섹스로 직결된다. 그러다 보니 한국 드라마의 절제된 사랑의 감정에 신선한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여전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키스하는 걸 보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든다. 어느 땐 그들 사이에 케미 (chemistry)가 엿보여 '혹시 주인공들이 연기하다가 실제로 사귀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와 호기심마저 든다. 신기한 건 얼마 후에 그들이 정말 사귄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매사 예민해지고 우울해지는 갱년기 여성들이 멜로드라마를 즐겨 보는 이유라면? 그것은 내 안의 연애 세포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고 가상의 커플을 통해서 나이가 들어서도 로맨틱한 경험을, 에로틱한 상상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남은 세월은 추억으로 사는가. 해마다 아카시아 꽃잎이 흩어질 무렵이면 수십 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첫 키스, 그 순간이 피어올라 입술도 밝은 꽃색으로 발라보고 세차게 뛰는 심장만 공연히 부여안는다.

 

<한국산문 7월호,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