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그 물건, 그 마음

                                                                                                              이희숙

 

 

  요즈음 나는 긴장된 시간을 산다. 과학과 IT산업의 발달로 생활이 편리해지긴 했지만 새로운 지식을 취득하느라 숨이 가쁘고 벅차기 때문이다. 신발명품이 옛것을 밀어낸 탓에 유효하게 사용하던 물건도 사라진 지 오래다. 빠른 변화 속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이 파산을 맞는 상황도 본다. 내 곁에 있는 케케묵은 물건을 꺼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변하지 않는 가치와 생활 속에서 주는 의미를 살펴본다.

 

  나는 어린이 학교를 삼십 대 후반에 개교했는데 이제 육십 대 후반을 지난다. 이곳은 내 젊음이 묻어 있는 곳으로 낡은 책상과 책장이 놓인 사무실은 거의 30년 전 모습 그대로다. 여기에 타자기만 있다면 영화에 나오는 80년대의 풍경이 될 것 같다. 동요와 옛날이야기가 담긴 카세트는 여전히 책장 위 제자리에 앉아 있다. 철마다 들려주었던 카세트의 노래 속에는 잊지 못할 기억과 행사가 담겨 있다. 다목적교실 문을 들어서면 벽 한쪽에 진열된 낡은 비디오도 있다. 비가 와서 바깥 놀이를 못 할 땐 이 비디오를 즐겨 상영하곤 했다. 개교 초엔 사진을 찍을 때 코닥 필름을 사용했다. 행사 때마다 내 주머니에는 여분의 필름이 여러 개 들어있었고 민첩한 손놀림으로 새 필름으로 바꿔 끼우기도 했다. 유치원을 졸업하는 어린이에게 추억을 남겨주고 싶어 예쁜 메모와 함께 앨범을 손수 만들어 식장에서 한 명 한 명에게 선물로 주었다.

 

  새로운 혁명과도 같이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하니 편리했다. 예전에 쓰던 필름은 소비적이었지만 이 새로운 것은 사진을 찍은 자리에서 곧장 확인한 후 지울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뭔가 잃어버린 게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인화하며 현상을 기다리던 설렘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나도 시대에 적응한 탓일까. 요즈음 20년 넘게 수작업으로 만든 사진첩을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를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너덜너덜해진 사진을 산뜻하게 정리 보관하고 싶어서 컴퓨터 온라인작업으로 앨범을 만든다. 격이 높아진 탓인지 사진 속 아이들이 한결 생동감이 넘쳐 보인다. 그 순간을 영원으로 남기고 싶어 나는 사진첩을 다시 꾸미고 있다.

 

 

   해마다 찍은 졸업생의 사진이 사무실 벽에서 그때 그 모습으로 웃고 있다. 사진은 모습만이 아니라 감정과 추억이 담겼기에 소중한 기념품이 된다. 졸업한 몇 년 후 그 귀한 것을 들고 찾아와 인사하는 어린이도 있다. "선생님, 얘가 저예요. 기억하세요?"라며 손가락으로 가르치면서.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지면이며 관심과 애정이 들어있는 물건이다. 정성 어린 손길의 흔적을 통해 그때 느꼈던 감정은 우리의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시절엔 좋은 곡이 있으면 카세트를 복사해서 쓰곤 했는데, 그 후 MP3 파일로 다운받아 사용하다가 이젠 다운로드도 필요 없이 스트리밍한다고 한다. 퇴색된 카세트에서 어린이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솝이야기, 전래 동화를 들려주던 시간 속의 감동으로 빠져들며 옛 음악과 스토리를 재생시키고 싶어서 보관하고 있다. 시대에 뒤진 교육 미디어인데도 말이다. 요즈음 만들어진 빠른 속도의 폭력적인 영상에 비교하면 더 좋은 교육자료가 틀림없는데, 문제는 플레이어(player)를 이젠 생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 기계를 구할 수 없어서 귀중품을 모시듯 조심해서 사용한다. CD, 캠코더도 마찬가지로 이미 골동품이 되었다.

 

  오래된 환경과 낡은 물건을 고수하는 것은 변화를 싫어해서만은 아니다.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초심으로 임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언젠가 새로운 시스템으로 바꾸겠지만 그때까지 쓰고 싶은 마음은 향수일까? 젊은 선생님이 생소하다며 웃다가도 늙은 원장이 고집하는 가치를 이해하며 공감해준다.

 

  물건은 새롭게 창조되고 발전하지만 변하여 사라지는 것도 많다. 나는 아직도 옛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본래의 모습을 재조명해 보며 그 시절로 돌아간다. 그 마음을 간직한 채 쌓인 먼지를 닦아 회상의 바구니에 다시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