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막측(新墓幕側)'이 새겨진 티셔츠

                                                                               (6. 14. 2021 중앙일보 이아침에)

                                                                                                      이희숙

 

 

 

 

 

  낭랑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아빠, 아빠!" 소리에 솔깃하여 고개를 들어보니 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우리 집 잔디밭에서 해맑게 웃으며 뛰어논다. 아이는 '신묘막측'이라는 글자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입고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한자어, 흔히 접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단어의 티셔츠에 얽힌 사연을 후에 딸을 통해 듣게 되었다.

 

  그 애의 엄마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에서 성장했다. 결혼 후 출산한 큰딸의 이름은 러시아어로 '사랑'의 뜻을 가진 '유비'라고 지었고, 둘째가 잉태된 사실을 알고는 이름을 '소망'의 뜻을 가진 '나디아'로 하기로 했다. 임신 소식에 기대와 소망으로 부풀어 있던 5개월이 지나는 때에 갑작스레 하혈하더니 유산이 되었다. 의사도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의논할 사람이 없는 외국 땅에서 홀로 감당해야 했기에 두려움은 더 크게 다가왔다. 귀한 생명을 잃은 좌절감에 잠을 잘 수 없었고 자리에 누우면 몸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밤을 지새우며 그녀는 많은 생각을 했다고 했다.

 

  나도 잊고 있었던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났다. 둘째 태아를 몸에 품고 입덧이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교회 학생부의 '문학의 밤' 행사가 많은 교인의 관심과 열정 속에서 열리던 날이었다. 나는 수고하는 학생들을 위해 떡라면을 큰 가마솥에서 끓여 후식으로 제공했다. 면발이 퉁퉁 붇지 않도록 조바심을 내며 대접하고 늦은 밤 잠자리에 누웠다. 갑자기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밤새 진통이 계속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피곤해서 곤히 자는 남편을 깨울 수 없어 진정되길 바랄 뿐이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괜찮을 것이라는 작은 믿음으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산부인과 문을 들어섰다. 진료를 마친 의사는 "아기가 유산됐습니다.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라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놀랍고 당황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수술을 받고 영양제를 맞으며 안정을 취한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버스 유리창 밖의 가로수 잎새는 여전히 푸른 하늘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었고, 그 아래 엄마의 손을 잡고 지나가는 아이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나의 표정을 의아해하는 남편을 보니 그제야 눈물이 쏟아졌다. 무지한 엄마였던 나는 아기에게 미안했고 허무하다는 우울감에 빠졌다. 이렇게 쉽게 소중한 생명을 잃어버리다니! 빼앗긴 원망보다 놓친 실수에 죄책감이 컸다. 그 일이 있었던 후 아이를 출산할 수 없는 여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무엘 어머니 한나의 눈물 어린 기도가 가슴에 절실히 와 닿았다. 실망 가운데 있던 나는 일 년이 지난 후 다시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기능이 정지된 듯한 내 몸속에 생명이 싹텄다는 의사의 진단을 듣고, 이른 봄에 추위를 이겨내고 피어난 개나리의 노란빛처럼 마음이 밝아졌다.

 

 

  유비 엄마는 유산의 절망에서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음성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내가 주를 찬양합니다. 이는 내가 신기하고 놀랍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하신 일들은 놀랍습니다. 주의 눈이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내 몸을 보셨습니다.'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었다. 그녀는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달은 후 티셔츠에 '신묘막측'이라는 구절을 인쇄해 다른 아이의 엄마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신묘막측'은 신통하고 묘하여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당신의 아이는 하나님이 기이하게 만드신 소중한 생명입니다. 그 아이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 단어를 본 엄마들은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설명을 들은 후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가정의 자녀가 고귀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많은 엄마가 같은 마음인 양 티셔츠를 구매하는 일에 동참했다. 아픔을 승화시킨 딸의 친구는 티셔츠의 이익금을 선교사 자녀를 돌봐주는 비영리 단체 'Mi Casa Tu Casa Community'에 기부하고 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어린이학교 커리큘럼에 'Children will learn to be independent, grow positive, self-respect, and healthy self-esteem.'이라는 구절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즉 유아교육은 아동이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자아 존중감과 건강한 긍정적 자아개념을 세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에 대해 배우며 '나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목표이다. 자신을 존중하며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한다. 어린이가 세상을 소신껏 살아갈 마음 바탕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은 특별한 사역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고 찬양받을 것이다. 오늘도 '신묘막측'한 존재인 우리를 통해서 선한 능력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