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구석에 어제 없던 물건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한 말들이 쌀자루가 목에 타이를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아마도 시골 사시는 사돈이 보내온 것일 게다.
나는 맞벌이하는 아들네 집에 쌍둥이를 돌보러 다닌다. 이 나이에 무엇으로든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일 아닌가. 쌍둥이 손녀에게 아침을 먹이고 간식으로 참외를 깎아 내어준 다음 설거지까지 마쳤다. 커피를 한 잔 타서 식탁에 앉아 있으려니 아직도 뽀로통하게 서 있는 쌀자루의 심술이 장히 눈에 거슬렸다.
쌀벌레를 막기 위해 며느리가 2ℓ들이 페트병에 쌀을 넣어 둔다는 것을 아는 터라, 바쁜 일손을 덜어줄 겸 소분(小分; 적게 나눔) 작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쌍둥이의 시선을 유아용 TV 프로그램에 묶어두고 준비에 나섰다.
돌보미 노릇을 오래 하다 보면, 살림살이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알게 된다. 우선 쌀을 담아 두던 빈 페트병 여남은 개를 깨끗이 털어 내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깔때기와 국자를 꺼냈다. 작업 중에 쌀이 바닥으로 흩어질까 저어하여 큰 대야까지 준비했다. 대야 안에 페트병을 세운 다음 입구에 깔때기를 꽂고 국자로 쌀자루의 쌀을 퍼내 부었다. 깔때기를 통과한 쌀이 좌르르 소리를 내며 페트병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푸근한 먼지를 날리며 막힘없이 내려가던 쌀이 깔때기 안에서 그대로 멈추어 선다. 아래위로 공기가 안 통해서 그런가 싶어 살짝 들어 봐도 그대로다. 가만히 살펴보니 쌀눈이 있는 모난 부분끼리 만난 쌀알이 서로 엉겨 있다. 깔때기를 좌우로 흔들며 살짝 충격을 주니 다시 솔솔 내려간다. 투명한 깔때기 덕에 쌀알 내려가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왼손은 깔때기를 잡고, 오른팔은 국자에 연결된 로봇 팔처럼 왕복운동을 한다. 한 병 두 병 단순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몸 따로 머리 따로 유체이탈 상태에 접어들고, 쓸데없는 생각은 개발새발 끝을 모르게 이어진다.
쌀을 나누는 작업은 위와 아래를 연결하고 소통하는 일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도와주는 깔때기가 없다면 쌀자루에 담긴 쌀을 어떻게 페트병에 옮겨 담을지 난감하다. 깔때기를 작은 빨대를 합쳐놓은 거대한 빨대, 자본주의 형상과 같다고 폄훼하는 분도 있지만, 하얀 쌀을 옮기느라 수고하는 깔때기를 앞에 두고 함부로 내뱉을 말은 아니다. 깔때기가 무슨 죄랴. 깔때기를 갖고 빨대 짓을 해 대는 위인들이 문제지.
둥글게 보이는 쌀에도 모난 데가 있어 내려가지 못하고 걸리듯이 사람의 마음도 항상 매끄럽게 한곳으로만 향하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는 모순(paradox)과 비이성(deraison)이 내부에 존재한다. 그것들은 때로 자아와 싸우거나 자기네끼리 부딪치기도 하며 무시로 방향을 바꾼다. 쌀이 페트병 안에 처음 떨어질 때는 요란한 소리가 나다가 바닥에 어느 정도 쌀로 채워지면 조용해진다. 사람도 처음 만나면 아웅다웅 다투며 마찰음을 낸다. 그러다 교류가 많아지다 보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깔때기를 좌우로 흔들어 걸린 것을 내려가게 하듯이 대화를 통해 관계를 복원할 수 있다.
깔때기의 원뿔 모양은 생존과 밀접한 자연에서 특히 유용하다. 수직으로 놓여 있으면 더욱더 그렇다.명주잠자리의 애벌레인 개미귀신은 깔때기 모양의 구멍을 파고 숨어 있다가 개미 따위의 작은 곤충이 미끄러져 떨어지면 큰 턱으로 잡아먹는다. 깔때기 그물 거미도 관 입구에 쭉 벌려진 깔때기 모양의 그물을 만들어 먹이를 잡아먹는다. 나팔꽃과 같은 통꽃은 깔때기 모양으로 생긴 꽃잎으로 나비와 꿀벌을 유인한다. 물고기를 잡는 통발도 같은 원리다. 깔때기의 주둥이가 넓고 출구는 좁은 특성 때문에 입구에 한번 발을 디디면 되돌아 나오기 어렵다.
시간의 비가역성(非可逆性, irreversibility)을 숙명으로 짊어진 인생도 잠시 멈춰 서기는 하지만, 깔때기처럼역류하는 일 없이 내려간다. 젊을 때는 이것 저일 다 집적거려 보지만 갈수록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결국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직업을 선택하거나 평생의 반려자를 정하는 일도 그렇지 아니 한가. 처음이나 시작할 때의 혼란(chaos)은 질서(cosmos)로 마무리된다. 그러니 넓은 길이 좁아졌다고 슬퍼하거나 화낼 일이 아니다.
쌀을 옮기다 보면, 아무리 조심해도 깔때기 바깥으로 얼마간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그때를 대비해서 페트병을 대야 안에 세워두었기 때문에 주방 바닥으로 흩어지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니, 페트병을 자식이라 치면, 대야는 부모 역할을 한다. 먼발치에서 있는 둥 마는 둥 자식을 바라보다가 은근슬쩍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이 부모 역할이 아니던가.
어느덧 쌀자루가 속에 든 것을 모두 비워 내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되가 얼마나 후한 지, 하얀 쌀로 가득 찬 페트병이 열 개를 훌쩍 넘어선다. 어느 인심 좋은 쌀장수의 됫박질인들 친정아버지의 마음과 비교할 수 있으랴. 손바닥 위에 놓인 한 톨 한 톨마다 사랑이 깃든 생명의 알갱이다. 대야 안에 떨어진 낱알 몇 개까지 살뜰하게 쓸어 담는다.
바깥일과 가사로 바쁜 며느리의 일손을 눈곱만큼이나마 덜어 주었다는 마음에 절로 어깨가 펴진다. 작업을 마치고 식탁에 앉으니 아까 만들어 둔 커피가 싸늘하게 식어버려 향기마저 가뭇없다. 그러나 그 어느 유명 바리스타(Barista)가 만든 커피보다 더 구수하다. 커피를 마시다 말고 싱거운생각 하나가 별쭝나게 삐져나온다.
재물 많고 학식 높은 부모를 만나야만 금수저랴. 손수 지은 쌀을 찧어 보내주는 친정아버지, 따로 시키지 않아도 그 쌀을 살뜰하게 소분해 주는 시아버지를 둔 며느리야말로 양손에 금수저를 쌍으로 쥔 게 아니고 무엇이랴. 하지만 대낮의 느닷없는 시아버지 호언난설(胡言亂說)에 며느리가 맞장구를 쳐줄는지는 정녕 알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