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버린 잔 / 안도현
조용필의 히트곡 중에 <바람이 전하는 말>이라는 노래가 있다.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행복한 너는 나를 잊어도 어느 순간 홀로인 듯한 쓸쓸함이 찾아올 거야” 죽음과도 같은 이별 뒤에 연인의 가슴속에 찾아오게 될 공허함을 다독이는 노래의 마지막은 이렇다. “착한 당신 속상해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 조용필 특유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실려 이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면 괜히 가슴에 금이 찡 가곤 했다. 20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하도 많이 들어서 가사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는데 어느 날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가사 2절 한 부분 때문이다. “타버린 그 재 속에 숨어 있는 불씨의 추억”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더니 내가 귀로 들어 익숙한 그 가사가 아니었다. 나는 수십 년간 “타버린 그 잔 속에 숨어 있는 불씨의 추억”으로 알고 있었던 것! 조용필은 노래의 절정 부분에서 강한 된소리를 많이 쓰는 가수다. “타버린 그 재 속에”를 나는 어처구니없이 “타버린 그 잔 속에”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듣기 능력의 오류를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마음 한쪽이 못내 찜찜하였다. 연인들이 나누던 술잔이 이별 뒤엔 다시 그럴 일이 없으니 타버린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게 더 시적이면서 절절하기 않은가? 타버린 재 속에 불씨가 남는다는 건 너무 식상한 표현이 아닌가? 나는 끝내 우기고 싶었다. 나 혼자만의 상상력과 은유는 별것 아닌 사실 앞에 무너지고 거세되고 만 것이다. 상심이 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