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꿈 / 정희승
가까운 곳에 볼일이 있으면 으레 자전거를 타고 간다. 차로 가면 오히려 번거로운 게 많아서다. 오늘도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2km쯤 떨어진 수산물 센터에서 도미 두 마리와 회 한 접시를 사왔다.
자전거를 타다보면 이상하게도 속도를 중시하는 현대문명에 대한 열광이 가라앉는다. 자전거는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다. 게다가 조용하고 겸손하다. 그러므로 빨리 가고자 서두르거나 조급하게 굴 필요가 없다. 꾸준함과 성실함만 있으면 된다. 회와 도미를 짐받이에 싣고 오면서, 거리 풍경에 너무 앞서가지 않도록 되도록 천천히 바퀴살을 돌렸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벚꽃이 난분분 휘날렸다. 중앙 대로를 따라 아름드리 벚나무가 줄느런하게 서 있는데, 부녀회에서 주관하는 벚꽃축제가 끝나면 으레 이렇게 대책 없이 꽃이 진다. 차 위에도 아스팔트 위에도 온통 꽃잎 천지였다. 내가 탄 자전거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지나는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가능한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벚나무 한쪽이 눈사태가 난 것처럼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 여파가 그 옆을 지나는 애먼 나에게까지 미쳤다. 자욱하게 휘날리는 분분한 꽃잎들이 나를 향해 엄습해왔다. 나는 꽃 사태를 뚫고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포도 위에 떨어진 꽃잎들도 바람에 어지럽게 이리저리 쓸려 다녔다. 전진이 결코 쉽지 않았다.
내가 사는 동 앞에 이르자 긴 대빗자루로 꽃잎을 쓰는 수위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모자에도 푸른 유니폼에도 연분홍 꽃잎이 곳곳에 들러붙어 있었다. 자신이 삶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이런 장면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 법이다. 자전거를 벚나무 아래 세워 두고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꽃잎이 많이도 떨어지네요. 그냥 두지 왜 쓸어요?
아저씨와는 평소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다. 겉보기와 달리 아저씨는 놀이마당 상쇠로, 시내 축제 때면 한가락 하는 이다. 삶의 박자를 아는 분이라고나 할까? 나이 차가 많이 나는데도 나와는 죽이 잘 맞는다.
“아무리 좋은 거라도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해요. 이대로 두면 주민들 원성을 사거든요.”
“세상에, 꽃잎이 많이 떨어졌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나요?”
“그렇다마다요. 세상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으니까요. 꽃이 지면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해져요. 나도 모르게 자꾸 쓸게 되거든요.
아저씨는 이미 쓸어놓은 곳에 꽃잎이 다시 떨어져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묵묵히 쓸어나갈 뿐이었다.
“양도 만만치 않겠어요?”
“그럼요. 이 아파트에서 거둔 걸 다 합하면 한 해 몇 섬은 될걸요.”
“몇 섬이나 된다고요?”
아저씨의 재미있는 표현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꽃잎도 때가 되면 거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내가 좋은 곳에 살고 있다는 다소 자랑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열매를 거두는 게 가을걷이이니, 꽃잎을 거두는 것은 봄걷이, 즉 춘수春收쯤 될까?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두 여인이 다가와 잠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나는 아저씨가 쓸고 있는 차도 쪽으로 자리를 비켜섰다. 하이힐을 신은 여인이 또각또각 걸어오면서 한숨 섞인 푸념을 늘어놓자, 플랫 슈즈를 신은 여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공기에 스민 달짝지근한 봄의 냄새에도, 바람에 휘날리는 꽃잎에도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걷는 그들의 태무심한 태도가 이상하게 아름답게 느껴졌다.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가는 플랫 슈즈에 눈을 두다가, 그들이 멀어지자 다시 물었다.
“그렇게 많은 양이 떨어지나요?”
“그럼요. 참, 그것은 꽃자루까지 포함해서 말한 거예요. 꽃잎은 사실 마르고 나면 얼마 안 돼요. 얇고 가벼운 꽃잎이 그렇게 많이 나올 턱이 없지요. 꽃이 다 지고나면 곧 꽃자루가 떨어지거든요.”
아저씨는 고개를 들어 손가락으로 꽃을 몇 달고 있는 가지 하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여기 꽃잎을 붙잡고 있는 자줏빛 꽃자루가 보이죠? 이게 근수도 많이 나가고 양도 많이 차지해요.”
“그것도 떨어진다고요?”
“그렇다니까요. 처음에는 가루받이가 안 된 것들만 떨어져요. 붙들고 있을 가치가 없는 거라, 꽃이 지고나면 나무들이 바로 떨어뜨려버리지요. 아주 많은 양이 떨어져요. 그게 끝나면 나무도 심사숙고하는 것 같아요. 가루받이가 이루어진 것은 함부로 포기할 수 없잖아요. 올해는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의 능력을 점검하는 거죠. 그때부터는 나무는 무척 신중해져요. 떨어지는 양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면 얼마나 고심하는지 알 수 있지요. 그 일을 마치는 데는 열흘 남짓 걸리는 것 같아요.”
“어떻게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다 아세요?” 아저씨의 박식함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 어떻게 알겠어요. 그저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라 경험으로 아는 거지.”
잠시 쓸기를 멈추고 고개를 쳐들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 뒤로 눈송이처럼 무량하게 떨어지는 꽃잎들, 꽃잎들. 아저씨의 선한 웃음이 묘하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집으로 돌아와 회와 도미를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몸을 씻었다. 이맘때가 되면 황사가 잦아 밖에서 돌아오면 바로 씻는 게 좋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모처럼 속돌로 공들여 발뒤꿈치 각질을 벗겨냈다. 그러고 나서 발을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발샅과 발바닥, 발뒤꿈치는 물론 아킬레스건을 지나 가자미근육이 시작하는 곳까지. 발을 주무르다가 볼썽사납게 튀어나온 복사뼈를 자극해서였을까? 금세 발바닥이 복숭아꽃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내 몸 안에도 꽃물이 도는 것을 보면 봄은 봄인 모양이었다.
몸을 씻고 나오자 도미를 손질하고 있던 아내가 주방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탄성을 질렀다. 검은 비닐봉지에 묻어 있는 꽃잎을 보고 자극을 받은 듯했다. 다소 들뜨고 과장된 아내의 목소리가 집 안 가득 울려 퍼졌다.
“도미가 벚꽃 그늘에서 잠을 자다 왔나 봐요. 몸에 온통 꽃잎이 덮여 있어요. 이 꽃 비늘 좀 보세요. 칼등으로 머리를 쳐도 봄꿈에 취해 깨어날 생각을 안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