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난이 봉오리를 맺다

                                                                                                           이희숙

 

 

  꽃이 졌다야들한 꽃잎이 모두 떠나간 가지는 메마른 몸을 겨우 지탱하고 서 있다작년에 나는 골반골절 수술을 했다그때 지인이 보내준 양난(Orchid)은 홀로 누운 나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였다연분홍진분홍하얗고 노란색의 조화가 아프고 지친 마음을 밝게 해주었다희망을 좇는 나비 떼를 연상케 했다환한 에너지가 햇살과 어우러져 방안을 채웠다침대에 누운 채 바라보니 고마운 분의 기도가 마음에 와닿은 것일까 치료의 효력이 생겼다.

 

  병상에 누운 지 넉 달 만에 나는 일어나 워커를 짚고 걷기 시작했다내 몸은 회복되었지만마음을 만져주던 화분 속의 꽃잎은 시들기 시작했다화려한 영화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쇠잔해지는 것처럼 어느날 양난은 고개를 떨구고 흙 위에 주저앉았다꽃이 없는 나뭇가지는 앙상했다막대에 불과한 볼품없는 모습에 잘라 주고 싶었지만 다른 화분 틈에 두었다. '꽃 역시 영원할 수 없겠지.' 혼자 중얼거리며 창가에 놓고 물을 주었다.

 

  이민 생활에 정착하기 위해 젊은 시절을 치열하게 살았다건강을 잃은 후에야 고향을 떠난 서러움에 지난날을 되돌아보았다여고 시절엔 문학소녀의 꿈을 품은 작은 봉오리를 맺고 있었다잊었던 그 꽃봉오리가 병상에서 겨울을 보내는 가슴에 다시 움을 틔웠다먼지 묻은 일기장을 찾아내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병상일기를 쓰며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골반 골절 수술과 팬더믹으로 갇힌 세상에서 글쓰기에 매진했다사람의 만남과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어 왔는데소통이 끊긴 적막을 이겨내기 어려웠다육체의 아픔을 견디며 가슴속에 맺힌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냈다글이 그 작업의 매체가 됐다깊은 생각과 성찰로 이끄는 기도가 되었다.

 

  일 년을 훌쩍 넘기는 시간이 지나간다추운 바람이 떠나간 하늘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햇빛이 내리비치며 창 안 깊숙이 자리 잡는다커튼을 걷으며 작은 양난에 눈길을 준다다시 움이 돋고 연한 가지가 나온다햇살 아래 물기운만 있으면 다시 싹을 내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가 보다죽음을 거쳐 생명을 생성하는 계절의 순환이다초록 기운이 꿈틀거린다꽃봉오리가 맺히는 모습을 발견하며 놀란다새 생명이 움트는 신비한 힘을 느낀다봉오리가 꽃잎을 터뜨릴 때마다 살아있다는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운영하던 어린이 학교 원장직을 내려놓은 후 여러 생각에 마음이 착잡하다. TV 프로그램을 뒤적이다가 은퇴 후 새로운 도전을 하는 '쓰리 박'을 본다세계 정상을 쟁취했던 그 열정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가는 모습이 신선하다승리욕 때문만은 아닐 터이다우린 무언가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길 원한다. '내가 도전하고 싶은 두 번째 푯대는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글 모임에 참석하는 행운이 왔다배우는 것이 즐거웠고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컴퓨터에 앉아 글과 씨름을 하면서 뒤늦게 작가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스트레스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발전을 가져온다는 대답을 얻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고 읊조렸다수필 등단으로 작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며 독자의 견해에서 글을 써야 함을 깨우쳤다감동이 있는 글을 쓰기 위해 겸손히 밤을 지새우는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알았다.

 

  몇 년 동안 공부해오던 시 창작 교실 선생님으로부터 제안을 받는다. "그동안 써서 모인 시가 130편가량이 되니 이제 시집을 발간해도 됩니다."라고 하신다숨죽이고 가라앉았던 깊은 곳에 불씨를 던져 주신다설레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컴퓨터 앞에 앉는다.

 

  반평생을 아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웃음에서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보았다동시는 꽃봉오리 속에 숨겨진 마음을 옮긴 글이다단순하지만 순수해서 좋다동시집과 일반시집 두 권으로 출판하기로 한다동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 동시집에는 삽화도 넣는다우리 학교에 출석했던 어린이에게 내 동시를 소개하고 그림으로 그리게 한다상상외로 놀라운 표현력을 보여준다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이 각기 다르고 재미있다어린이만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학부모의 적극적인 협력 속에서 프리스쿨부터 8학년까지 25명이 참여한다시와 그림의 아름다운 동행이 되어 진정한 동심이 그려지는 시집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오늘도 글을 쓴다양난에 물을 준다봉오리가 꽃을 피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