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뚝배기 왕린

 

 

 

가을비 추적거리는 날된장찌개를 끓이려고 재료를 꺼내다 그 애와 마주쳤어큐 사인을 기다리는 배우처럼 자신만만해 보이더라고톱톱한 찌개에 안성맞춤인 게 고놈인지라 나도 당연히 그 애를 찍었지. ‘꼬마 뚝배기!’

오래전에 집들이 선물로 들어온 거야아가리 지름이 채 한 뼘도 안 되지만얼마나 암팡져 보이던지어떤 센 불에도 끄떡없을 것 같았어불이 닿는 아랫부분은 유약이 묻지 않은 흙빛이고무늬가 새겨진 윗부분은 회갈색 유약을 살짝 발라 나름 멋을 냈더군.

여느 집이 그렇듯 우리 집에도 냄비가 수두룩해스테인리스를 비롯해 법랑자기양은냄비까지냄비들을 놓고 비교하자면 뚝배기는 그리 세련됐다고 볼 수 없지투박하기 이를 데 없고 무겁기가 웬만해야지능청스러움을 짐작 못 하고 덜컥 잡았다가는 손 데기 십상이고.

그런데 조금 미련해 보이는 뚝배기가 보통 쓸모 있는 게 아니야은근하고 구수한 맛에 길든 우리 정서를 담아내는 데 그만 한 그릇이 없더란 얘기지국물 바특하게 잡아 끓인 된장찌개그 맛을 제대로 살려내는 데는 제격이야보기에는 깔끔해도 된장에 스테인리스가 어디 어울리기나 할 법인가분 바르고 앉아 자기만 위해달라는 법랑 냄비나 어쩐지 오만해 보이는 자기 냄비는 이미 제쳐 두었고끓는다 싶으면 참지 못하고 들썩거리다 홀라당 뚜껑까지 날려버리는 양은냄비는 좀 경박해 보이잖아후딱 달아오를 때는 언제고 금세 냉랭해지는 게 변덕 심한 여자 같기도 하고그와는 달리 상 위에 올라앉아서도 한참을 열을 품고 있어 보글거리는 뚝배기를 보면 자기 태어난 불 온도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맵다 짜다 탓하지 않고 묵묵히 조려낼 줄도 아니 최고라는 얘기야뜨겁다 안달하지 않고 달아올라서도 진득하게 그 열 품어 주는 뚝배기의 미덕을 더 말해서 뭐해좀 더디고 투박하지만 속정 깊은 사람을 보는 것 같아.

하긴내가 예뻐한다고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닐지도 몰라허구한 날 불 달고 사니 열 받기 마련일 게야까탈 부리지 않는다고 만만하게 대한 게 새삼 짠한 마음이 들어 자세히 들여다봤어아이고이걸 어째낯빛 이상하다 싶었지만 지금 보니 영 아니네본정 모르고 무심했다지만이리 상한 것을 몰랐을까빛깔은 그렇다 쳐도 이 얼룩 좀 봐찌개가 넘치고 탄 흔적으로 꼴이 말이 아니잖아이런 몰골에 수세미질 아무리 한들 바탕이 다시 돌아올 리 만무고.

가만바닥에 난 실금은 또 뭐야얼마나 애 끓였으면 이리 벌어지고 말았을까다부져 보인다고 센 불에 들입다 끓여댔으니 가뜩이나 조그만 몸뚱이가 성할 리가 있겠냐고이 정도 금이면 찌개국물이 안 샜을까물기를 말끔히 닦아내고 물을 받아 봤어눈 씻고 봐도 물 한 방울 내비치는 기미가 없단 말이지어떻게 태어난 몸인데 실금 한 줄에 무너지겠느냐 이 악물고 버티는 중인지도 몰라.

새삼스럽게 내 모양새와 견주어 보니 다를 게 하나 없군윤기 가신 얼굴빛은 그렇다 쳐도 깊어가는 주름을 훈장이라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잖아숱한 산길 누비고 다닐 때는 무쇠 다리인 줄 알았는데 얼마 전부터 무릎도 삐걱대고.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네된장 뚝배기를 올려놓고 불을 댕겼어.

보글보글지글지글.’

때깔 이울고 실금 갔지만뚝심으로 버티며 팔팔 끓여내는 것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라고 들리는 것은 우연이 아닐 거야내 삶도 저 꼬마 뚝배기만이나 하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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