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맞는 날      (3. 20. 2021 중앙일보 이아침에)

                                                                                                                                        이희숙

 

  경쾌한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려왔다. ", 지금 코로나 백신을 맞고 왔어." 건강하고 행동이 민첩한 50년 지기 친구다. 그녀의 정보를 알려주는 소식이 고마웠지만 한편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코로나바이러스 발생 이후로 외출하지 못했다. 음식도 딸이 주문 배달해 주었다. 사람과 대면하지 않는 것이 최선책이라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도 머뭇거렸다. 부작용 때문에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어 면역 저하 약을 먹는 처지가 아닌가.

 

  접종에 대해 주치의와 전화 상담을 했다. "현재 미국에서 사용되는 화이자나 모더나 백신은 살아있는 백신이 아니고, mRNA라 하며 몸에 아주 작은 양의 코로나바이러스 단백질을 만들도록 자극하여 항체를 만듭니다. 빨리 개발된 탓에 부작용에 대한 염려가 있지만, 임상시험이란 신중한 최종 관문을 거쳤습니다."라는 설명에 용기를 내어 전화기에 Othena 앱을 깔고 신청을 시도했다.

 

  망설이는 동안 골든 타임을 놓친 탓일까? 예약이 힘들었다. '아차~' 하며 새벽부터 밤까지 여러 차례 들어갔지만, 여전히 기다리라는 문구가 떴다. 신문에 '백신 대란'이라는 타이틀이 보였다. 백신 공급 물량이 턱없이 부족한 탓이라고 했다. 2차까지 이뤄지려면 아마득했다. 기다리는 어느날 예약이 가능하니 스케줄을 잡으라는 메일이 왔다. 반가운 마음에 부리나케 예약했다. 장소가 Aliso Viejo Soka University였다. 차례가 왔다는 기쁨 뒤에 염려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죽은 사람도 있다는데 괜찮을까?' 면역력이 없는 나로서 생존하고 싶은 솔직한 반응이다.

 

  어릴 적 맞던 예방주사가 떠올랐다. 그땐 주삿바늘이 엄청나게 크게 보였다. 홍역, 소아마비에 이어 해마다 콜레라, 장티푸스 등 전염병을 막기 위해 학교 행사로 주사를 맞았다. 옷을 팔뚝 위로 올리고 줄을 서서 기다릴 때의 긴장과 두려움을 잊지 못한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찔끔 감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어린 딸을 키우며 예방접종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꼈다. 수두의 예방주사가 개발되기 전이였기에 딸의 얼굴에 상처가 남을까 노심초사했지만 몇 개의 흔적이 남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예방주사의 고마움을 모르는 딸은 주사기를 든 간호사가 무서워 흰 가운을 입은 사람만 보면 큰 소리로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 딸의 예방접종 카드를 중요한 이민 서류로 챙겨 왔다. 지금도 예방접종 카드는 어린이가 학교에 입학할 때 갖추어야 할 필수 서류이다. 접종 카드가 마치 건강보증서 같은 역할을 한다. 그만큼 면역력을 기르기 위한 백신은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당일 아침 일찍 딸이 동행해줬고, 손자도 할머니의 안전한 백신 접종을 위해 기도했다고 했다. Aliso Canyon 산자락에 위치한 널찍한 캠퍼스를 향하는 길은 한산했다. '산속으로 길을 잘못 들었나?' 생각하는 사이에 긴 줄을 이룬 차량이 눈에 띄었다. 줄을 서서 신원 확인을 마치고, 빙글빙글 돌며 강당에 도착했다. 질서 있게 진행되는 시스템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화이자 코로나 백신 접종을 했다. 2차 접종 또한 3주 후 같은 시간으로 예약했다. 부작용 점검을 위해 15분간 대기한 후 안심하며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와 하늘 높이 치솟는 분수를 보니 마음이 시원해졌다. 안개가 걷힌 캐년의 등선이 푸른 빛을 더해줬다. 팔이 뻐근하고 몸이 추운 증세가 나흘 동안 계속되다 사라졌다. 진통제는 면역형성을 방해한다고 하니 아파도 참고 견뎌야 했다.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약한 마음을 토닥였다.

 

  2차 접종 날짜가 10일 뒤로 연기됐다. 그 사이에 항체 생성 여부를 조사해 보았다. 항체가 생성되지 않았다. 복용하는 약 때문이니 꼭 2차 접종을 하라고 의사가 당부했다. 기대가 무너졌지만 실망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다음을 기약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고 2차 접종까지 마쳤다. 이제 가족과 이웃에게 폐 끼칠 염려가 없으니 홀가분하다. 집단면역을 위해 나도 한몫을 했다고 할까?

 

  백신은 선물이다. 백신이 개발되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온 세계를 옭아매는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이 틀림없다. 면역을 기른다는 '미생물에 대한 자기방어"라는 정의 이상의 넓은 의미를 생각해 본다. 잘 살고, 잘 늙어가기 위해 노년기 건강 관리가 필요하다. 건강이란 신체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명상과 유산소 운동으로 긴장을 완화해 주고, 즐거운 취미 활동으로 우울, 불안감을 방지하는 마음의 면역도 필요하다. 면역으로 다져 세상의 바이러스와 대결하길 원한다. 더불어 정신과 마음의 면역력을 어떻게 기를까도 생각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