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it go, 안젤라!

박진희

  

 한 흑인 여인이 갑자기 정신 분열 증세가 지나치게 심각하다며 상담을 요구해왔다. 정신과 심리 담당이 아니지만, 그 부서 사람들의 근무 시간이 이미 지났고 마지막으로 내가 피부병으로 진료한 환자라서 부득이 그녀에게 연락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십 대 후반인 안젤라는 저녁을 준비하려고 감자 껍질을 벗기다가 불현듯 옛날 생각이 떠올라 패닉 상태가 된다. 십대가 되자마자 어둑어둑해질 무렵, 그녀는 어이없게 집에서 강간을 당한다. 집안 식구들은 약물중독에 빠져 아무런 도움도 못 받고 더운물도 나오지 않아 더러워진 몸을 씻지도 못하고 혼자 상처와 아픔을 껴안고 지냈다. "그때 차라리 비명이라도 지를걸, 가까운 친구라도 있었으면 도망가 숨었을텐데. 마약에 쩔어있는 엄마를 흔들어서라도 깨웠을걸. 아니, 차라리 죽었어야 했어. 아냐, 그때 죽었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을거야." 안젤라는 17년이란 세월이 지났어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를 겪고 있다.

 그녀는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직장을 잃었다. "돈이 없어. 늘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거야. 정부에서 준다는 보조금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엄마가 죽으면 장례식은 커녕 관은 무슨 돈으로 사지? 남편은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을 일으키는데 독감인지 코로나에 걸렸는지도 모르겠어. 올망졸망한 아이들 셋은 피부병에 걸려 나의 오른팔에 옮았는데 온몸에 다 퍼지면 어떡해? 파스타와 감자 몇 개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느 남자가 갑자기 정문을 박차고 들어와  총으로 위협하며 모두 없애버린다고 하면 어떡하지?"

 안젤라는 차라리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싶은 생각에 잘 먹지도 않고 담배를 피운다.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걱정과 근심으로 조현병 약을 먹고 있다. 지난번 약은 효용이 없어서 끊었고 이번 약은 부작용 때문에 조금씩 양을 줄이고 싶다. 그녀만 바라보는 가족들 때문에 자살 생각은 안 하기로 했지만, 어둑해지는 저녁 이시간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난 직업적인 정신치료사가 아니라 이런 경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안젤라, 넌 이름처럼 아주 특별한 천사로 살아가고 있어. 네가 원한다면 네 곁에 다른 천사들이 다가와 너를 도울거야. 어릴적의 기억의 사슬에서 이제 그만 풀고 나오렴. Let it go. 넌 아직 너무나 젊고 아름다워.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그런데 오늘 뭐 좀 먹었니? 물은 마셨어?" 조금 후에 그녀의 음성이 얼마 전에 본 수선화를 떠올리게 한다. "알았어, 오늘 밤에 기도할게."

 

 코로나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도 몇 달을 집에서 직장도 없이 힘겹게 지내지만 특히 PTSD가 있는 사람들은 상상을 불허하며 위험한 생각에 빠져있다. 막 코로나 전염이 시작할 무렵, 아무 증상도 없는데 이게 세상의 종말이 아니냐며 아주 건장한 남자들이 걱정하는 경우를 봤다. 하물며 정신적으로 쇠약한 환자들은 불면증에 anxiety attack마저 겹쳐 견디지 못한다는 그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몸이 날렵하고 힘센 남자가 안젤라에게 "가만있어, 조용히 해. 죽여버릴 테니까..." 무기로 위협하자 깡마르고 힘없는 어린 그녀의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보인다. 마치 코로나로 죽어가는 사람처럼, 아무런 저항도 비명도 없이.

 하지만 안젤라는 살아있다. 앞으로도 그녀가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의료인의 몫인지도 모른다.그녀가 더이상 누구에게도 위협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내기를 기도하는 것마저도.

 

<재미수필, 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