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속 할머니                           (2.15.2021 중앙일보 이아침에 실림, 오렌지방 합평)

                                                                                                                                                                               이희숙

 

 

   

  영화 '미나리'를 보았다. 1980년대 남부 아칸소 시골에 이민 온 가족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농장을 이룰 꿈을 갖고 캘리포니아로부터 이사하는 장면으로 스크린이 열린다. 허허벌판에 바퀴가 달린 트레일러 집에서 살게 된 부부는 병아리 감별사로 일하게 됐다. 학교가 없는 외딴곳이기에 손주를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할머니도 오셨다.

 

  할머니 역할을 배우 윤여정이 맡았다. 그녀는 아카데미상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아 훌륭한 연기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할머니여서 그런지 영화 속 그녀의 역할이 크게 다가왔다. 큰 가방에서 꺼내는 고춧가루와 멸치를 보니 30여 년 전 먼 나라 미국에 이민을 간 딸에 대한 그리움도 함께 비닐봉지에 꽁꽁 싸서 보내주던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한국에서 갓 온 할머니와 손자는 다른 문화로 인해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정성껏 다린 보약을 쏟아 버리고, 쿠키도 만들지 못하는 할머니 냄새가 싫다던 손자가 변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거리는 좁아졌고 서로 동화되기 시작했다. 아들의 잘못된 행동을 훈육하기 위해 회초리를 가져오라는 아버지 앞에 부러진 나뭇가지와 가는 지푸라기를 내미는 손자의 위트를 바라보며 할머니는 몰래 미소를 지었다. 심장병으로 인해 뛰지 말라는 부모의 잔소리는 'strong boy'라는 할머니의 응원으로 바뀌었다. 격려는 아이를 걷게 했고, 달리게 했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야생화 핀 들판을 걷던 아이는 결국에는 신체장애를 극복하게 된다. 자연이 학교가 되고 할머니는 교사가 된 셈이다.

 

  이불에 오줌을 싸던 허약한 꼬마는 꿈을 이루려는 아버지의 강한 열정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가족을 지키려 했던 어머니의 사랑을 보며 자랐다. 어느 날 예상치 못했던 위기가 찾아왔다. 할머니의 실수로 창고에 화재가 발생하고 경작물을 모두 잃게 되었다. 손주는 죄책감으로 집을 나간 할머니를 찾아 헤매다 멀리 어둠 속을 허적허적 걸어가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말없이 손을 잡았다. 어린 두 아이의 잔잔한 사랑이 손끝으로 흘렀다.

 

  이민 2세로서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환경에서 자라야 했던 정 데이비드가 예일 Yale 대학을 졸업한 후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을 맡았다. 남우 주인공과 프로듀서를 맡은 연 스티븐 또한 한인 2세이다. 한인 후세들이 마음을 모아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며 찬사를 보낸다. 이 영화는 2020 AFI 어워즈에서 최고의 영화로 선정됐고, 골든글로브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며 한국 영화의 새 역사를 썼다.

 

  외국 땅에 정착하는 고되고 아픈 생활이 '미나리'의 생존력으로 대비되었다. 할머니가 한국에서 가지고 온 미나리 씨를 농장 물가에 심었다. 아무 곳에서나 자생하고 번식하는 미나리는 외국 땅에서 이민의 터전을 내림에 비유된다. 미나리는 심은 지 1년 후부터 잘 자라는 것처럼 우리의 후세들이 꿈을 내려 행복하게 가꾸어 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몸으로 부딪치며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부모의 희생이 밑거름되어 터전이 든든히 다져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새벽부터 밤까지 30여 년간 달려온 이민 개척 생활이 힘들었다. 맨손으로 많은 것이 이루어졌다고 긴장이 풀리는 나이 쉰둘이 되던 해에 참기 어려운 고통이 밀려왔다. MRI 촬영 결과 자가면역질환의 하나인 Devic's 병이었다. 척수 속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척추를 둘러싼 신경을 공격하여 마비를 가져왔다. 눈과 오른쪽 몸에 마비 증상이 나타났고, 실명 위기와 휠체어를 타는 고난을 맞았다. 그때 첫 손자가 태어났다. 그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나도 혼자 걷는 물리치료를 받았다. 넘어질 듯 걷는 손자를 따라가며 내 다리에 힘이 생기고 균형 있게 걸을 수 있었다. 손자의 성장을 보며 회복의 속도는 빨라졌다. 딸이 바쁜 시간엔 내 사무실에서 그를 돌보았다. 동화책을 읽어주고 그림도 그리고, 퍼즐, 비눗방울 등 다양한 활동으로 마음을 나누었다. 초등학생이 되어 우리 집에 오면 한글을 가르치고 한식을 만들어줬다. 올가을에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손자는 여전히 "할머니가 만들어준 김치찌개가 my favorite food예요."라고 엄지를 든다.

 

  십자가를 멘 'Cross Guy'가 길을 걷는다. 고통을 감수하는 인내의 길이다. 이민 개척의 길 또한 그랬다. 이민 3세인 우리 손자의 가슴에 나는 어떤 할머니로 남겨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