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기

 

 

 

 

 날이 갈수록 사람 보는 눈이 바뀌어 간다.

 예전에 나의 관심은 그들의 학벌 인물 배경… 이런 것들이더니, 지금은 오직 그들의 얼굴, 또한 나의 얼굴이다. 인물의 골격에 기초한 잘생김 못생김의 구분이 아니라, 다분히 관상학적인 관심으로 그의 얼굴에 깃든 세월과 품격,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잔주름이 앉기 시작하던 삼십대 초, 거울 앞에서 호들갑 떨던 일들이 귀엽게 떠오른다. 기억 속 여인은 영화배우처럼 챙 넓은 모자로 멋을 내고 맥시 드레스를 차려 입고 조그만 딸애의 손을 잡고 있다. 봄날의 공원은 화사하기 그지없다. 피식 웃고 고개를 드니 거울 속에서 쉰이 멈칫 다가선다. 잔주름은 깊어졌고 살갗은 두꺼워졌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아 다시 한 번 거울에 대고 화사하게 웃어 주었다. 노화가 그 옛날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제가 되지 않고서야 노화를 멈출 수는 없다. 의술로 노화를 좀 늦출 수 있다 해도 그것이 항구적 처방은 되지 않는다. 까탈스런 성미는 처진 눈꼬리로 인해 온순해 보이고 새된* 목소리는 느린 저음이 되었다. 눈가에 잔주름이 늘면서 그리움이 늘었지만 이야기 거리가 많아졌다. 내 키보다 웃자란 아이들로 인해 기쁨도 갑절 늘었다. 따지고 보면 별로 잃은 것이 없다. 노화란 그런 것이다. 오래 사용해서 손에 익은 연장처럼 인생이 연마되는 것이다.

 

물건을 사려다 보면 명품이라 불리는 것과 대중적인 제품을 비교해 보게 되는데, 그 어마어마한 가격차이에 비해 품질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명품을 구별하는 이유는 그 작은 차이에서 오는 ‘특별한 느낌’ 때문일 것이다. 명품일수록 속이 좋고 마무리가 잘 되어 있다. 가격이란 그 내면의 품질과 작은 차이에 지불되는 것인 셈이다. 인생도 왜 아니 그럴까? 명품 인생은 세월을 담보하여 아주 조금씩 아주 느리게 완성되어 간다. 그런 사람에게선 ‘특별한 향기’가 난다.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은 피부의 노화가 아니라 나이만큼 철들어 가는지, 여야 하겠다. 나잇값만 하고 살아도 인생에 본전은 하고 사는 것이니.

 

과학적 발명들은 고효율을 추구한다. 그러나 유정(有情)의 깨달음이란 세월을 녹여 내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니, 이 때에 나타나는 미려한 떨림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다. 쉰이 서른보다 나은 것은 이 떨림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되었음이다. 어느 재미교포 사업가가 아들에게 주었다는 편지에서 “아들아,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했단다. 청운의 아들이 그 뜻을 알까만은, 인생  100세 시대다. 조금씩 놓아주고 조금씩 얻으며 살진 속사람이 되어가야겠다. 그리 할 수 있다면, 예순인들 불러 맞지 않으리.

 

 

 

 

*새되다: 목소리가 높고 날카롭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 가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