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나무를 심는다                                               (12/31/2020 중앙일보 이 아침에 실림)

                                                                                                                                                                                                                                                                                이희숙

 

  

 

 

 

  나이 탓일까? 그동안 해오던 일상이 벅차게 느껴져 손을 놓고 싶다. 몸도 약해져 의욕을 잃고 침울해진다. 복막투석을 집에서 하는 남편의 간호사 역할도 큰 몫을 한다. 은퇴해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한 바람으로 다가온다. 지금 운영하는 어린이학교는 30대 젊음의 열정으로 황무지에서 이루어낸 교육 현장의 결정체이다. 땀과 정성이 깃든 이곳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수선하다. 학교 곳곳에 나의 손때 묻은 흔적이 보인다.

 

 

  눈길이 닿는 곳에 우리와 같이 성장하며 곁을 지켜 온 아보카도 나무가 있다. 그 나무는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를 바라보니 분신을 떼어 놓는 것처럼 아쉽다. 그때 조카는 그 아보카도 씨를 싹 틔워 화분에서 키웠다고 했다. 아쉬워하는 나의 마음을 위로하며 그 묘목을 나에게 가져왔다. 식목일을 정하고 아기 나무를 화분에서 넓은 땅으로 옮겨심기로 했다. 우리 집에서 햇볕과 물 빠짐이 좋은 적당한 장소를 골라 은퇴 후의 새 터전으로 삼았다.

 

 

  은퇴라는 저무는 계절에 다져진 관록을 밑거름 삼아 제2 인생의 발돋움으로 어린나무를 심었다. 조카와 손주, 다섯 명이 연장을 들고 모였다. 삽으로 땅을 파 구덩이를 만들고, 연약한 뿌리에 물을 주고 거름을 부어 흙을 북돋웠다. 화분에서 넓은 대지로 옮겨 심었다. 행여나 뿌리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정성을 다해 작업했다. 지난날 고국을 떠나 우리가 겪었던 이민 생활의 정착과도 같은 상황이라 생각했다.

 

  1993년 지금의 어린이학교 교정 구석에서 어린 아보카도 나무를 처음 만났다. 교정에는 늙은 호두나무가 연륜을 자랑하고 있었고, 잔디밭엔 나지막한 라임 나무가 귀여운 손짓을 했다. 올리브 열매가 까맣게 익어 모래밭을 덮고, 부겐베리아 진분홍 꽃그늘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틈에서 키 작은 아보카도 나무가 낮은 어깨를 겨누고 있었다. 옛 주인이 많은 나무를 정성껏 가꾸었기에 어린이학교 교정은 아름다운 운치가 있었다. 여러 교사와 한 마음 되어 열심히 임한 결과로 학교의 인지도가 높아지고 학부모의 호응 속에서 입학하는 인원수가 증가했다. 옆 건물을 확장하고 놀이터가 더 필요하게 되었다. 어린이가 우선이라는 생각에 아쉽지만 관리하기도 힘든 모든 나무를 정리하고 한 그루만 남겼다. 바로 잔디밭 구석의 어린 아보카도 나무였다.

 

  아보카도 나무는 홀로 남아 외로움을 타지 않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먹으며 쑤우 쑥 성장했다. 날이 갈수록 어린이의 키를 훌쩍 넘어 학교 건물 높이와 견주었다. 연하고 가늘던 허리가 거칠고 굵은 나이테로 연륜을 쌓아갔다. 나무는 그늘을 만들고 아래 놓인 의자에 아이들이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고 바람을 일으켜 쉼과 대화의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흰 꽃이 만개하면 향기로운 내음이 교정에 꽉 찼고, 생명을 잉태해 열매를 맺었다. 가을이 되면 담백 고소한 맛으로 선물을 안겨주었다. 추수철엔 친지와 열매를 나누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30년 가까이 우리 곁에서 극복해야 할 난제의 고비를 넘어 변함없이 같이했다. 이민 생활에서 일구어낸 성취의 기쁨을 나누었다. 인생의 동무가 되어 결실된 감사를 보여주었다. 학교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기록된 역사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제 오랜 세월 함께 한 지금 어린이학교 교정의 아보카도 나무를 역사 속으로 보낸다. 일터를 떠나더라도 새 터전에 또 다른 묘목을 심어 성장시키려 한다. 은퇴해도 남아있는 저만치의 길을 아직 갈 수 있다. 여전히 봄을 키우려는 여력의 몸부림일 수 있다. 나는 후세를 위한 나무를 심는다. 내일을 심는다. 영국 속담에 "1년이 행복하려면 정원사가 되고, 평생이 행복하려면 나무를 심어라."라고 한다.

 

  묘목은 자라나 아름드리나무로 자리 잡을 날이 올 것이다. 미래 어느 날에 우리는 자취를 감추더라도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후손들의 성장과 활약을 지켜볼 것이다. 그들에게 이국땅에 정착한 이민 1세인 부모와 조부모의 교육 유산과 자취에 관해 이야기할 것임을 안다. 새 역사가 뿌리를 내린 날이라고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