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홍시                                               (8/17/2020 중앙일보 독자 마당에 실림)

                                                                                                                                                 이희숙

 

  봄비가 내렸다. 예년과 다르게 메말랐던 남가주가 촉촉하다. 죽은 듯 보였던 나뭇가지는 연한 순을 틔우며 숨을 고르고 내면에 잠재했던 힘으로 더욱더 세게 물을 빨아올린다. 빗방울이 영롱하게 튕기는 이파리는 진초록으로 성장하여 꽃을 피우고, 작은 꽃일지라도 생명을 잉태하고 품었던 진액을 전달하여 열매를 맺는다. 햇볕과 바람에 힘입어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기까지 꽃과 꽃 사이를 부지런히 다니며 수분(受粉)을 도운 벌이 큰 몫을 했을 터이다.

 

  '열매를 맺는다'는 영어로 'bear fruit'로 표현한다. 'bear''견디다, 전달하다, 맺다'라는 뜻이다. 우리의 노력이 성과를 낸다는 의미로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도 시간이 지나가면 언젠가는 그 보람된 결과를 볼 수 있다. 성장 과정이 고통스럽고 힘들수록 그 과실은 맛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어머니는 다섯 그루의 나무를 심고 어려운 생활 가운데에서 정성스러운 손길로 길러내 귀한 열매를 맺었다.

 

  평범한 공무원의 아내였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은퇴하신 후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경영하는 포목점 사업이 성공하여 넉넉하게 자녀 교육을 뒷받침했지만, 몇 차례 이어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물질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학자금 융자도 없던 시절이기에 다섯 명의 교육비는 큰 액수였다. 그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학교 앞에 있던 우리 집을 활용하여 하숙을 쳤다. 지방에서 유학 온 학생에게 방과 이부자리를 제공하고 끼마다 식사를 준비하며 몸을 아끼지 않았다. 보일러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때라 방마다 시간을 맞추어 연탄을 갈아야 했고, 다른 식성을 가진 학생의 반찬을 만들기 위해 매일 시장을 내 집처럼 드나들곤 했다. 고향에 계신 엄마 역할까지 하며 여러 학생을 돌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 헌신으로 우리 오 남매는 원하는 대학교에서 각자의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우리 집 뜰의 과실수가 각기 개성을 가지고 나름의 모습으로 충실하게 자라고 있다. 우리 형제들이 자신이 받은 달란트로 소임을 다하듯이. 나뭇가지가 휘도록 주렁주렁 달린 대추가 붉은빛을 더해간다. 하얀 꽃의 달콤한 향내로 집 안 공기를 흔들던 오렌지는 탱글탱글 속살이 익어간다. 구아바는 자신이 함유한 효능을 자랑하며 굵어가고 감귤은 깜찍한 귀요미로 눈길을 끈다. 돌돌 말린 노란 별꽃에서 작은 감이 열리더니 아기 손톱만 한 크기에서 주먹만큼 둥그렇게 차올라 마침내는 알갱이가 누렇게 영글어 간다. 주황빛이 온 집안에 꽉 차면 어머니는 가족을 불러 만추의 기쁨을 나누셨다. 증손주까지 함께 모여 웃으며 우리는 누런 감을 한 아름씩 안았다.

 

  어머니와 이별한 지 100일이 훌쩍 지나간다. 나는 넘어져 골반골절 수술을 받은 넉 달 후 침대에서 일어나 워커에 의지해 걸음마를 뗀다. 한 발씩 걸음을 배우는 시간에 나는 많은 것을 깨닫는다. 일찍이 한 살배기인 내가 걸음마를 떼는 모습을 보며 흐뭇했을 어머니가 떠오른다. 대견해 하며 힘들었던 수고를 잊으셨을 텐데.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 어린 양육으로 자라나서 독립했던 내 성장 과정을 되돌아본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찾아온 우울증과 치매로 인해 내가 겪었던 '엄마 앓이'가 가슴에 맺힌다. 어머니는 똑같은 말씀만 반복하시고 때론 슬퍼하며 감정이 격해지곤 하셨다. 그땐 어머니가 변하는 모습이 당황스럽고 힘들게만 느껴졌는데. 이해하는 머리와 애석해하는 가슴과 실천하는 행동이 일치하지 못했던 내가 죄송스럽다. 못다 한 보살핌이 후회스럽고 한으로 남는다.

 

  어머니는 홍시를 좋아하셨다. 감을 따서 상자 속에 보관하면 시간이 지나며 고생하며 단단해진 근육이 풀리는 것처럼 딱딱하던 감이 노글노글해졌다. 혀끝에 닿는 달콤한 맛은 어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부드러운 촉감에 녹아들어 안정을 얻었는지 말랑말랑하게 익혀 두고 하나씩 꺼내 드셨다. 익어가는 감을 보며 주황빛보다 더 밝게 웃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 본다.

 

  햇볕이 따갑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과일은 피부에 윤택을 더하며 빛날 것이다. 추운 계절을 지나 봄 여름을 견디어 과실을 맺는 감나무처럼 우리도 수확할 날이 오리라. 나에게 오늘이 있도록 베풀어 주신 어머니께 감사하며 받은 은혜를 가족과 나눌 기대에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어머니의 웃음이 감나무에 매달려 뜰에 가득 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