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집착하는 한국인
2020년은 그토록 모질게 우리를 대 해 놓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또 새로운 365일을 들이밀었다. 보낸 이의 의도를 몰라 선뜻 첫발을 들여놓기를 망설였던 새해다.
며칠 전 오랜만에 용기를 내어 참석한 어느 모임에서 처음 보는 남성 분이 “동문이시라면서요”하며 다가왔다. 반갑게 인사를 끝내기가 무섭게 몇 살이냐고 묻는다. 황당했다.
동문을 만나면 선배인지 후배인지 물론 궁금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성급하지는 않다. 우회적인 방법으로도 알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문 가운데 누구나 아는 유명인사를 화제에 올려 그와의 선후배 관계로 상대의 입학연도를 짐작한다. 미국에 사는 우리에겐 도미한 연도도 상대방의 나이를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찌됐건 어떤 방법으로든 장유가 확인되어야만 친소(親疎)간에 진전이 있게 된다.
이념으로, 인종으로, 종교로, 빈부로 인류는 한사코 너와 나를 수평으로 간격을 두고 수직으로 갈랐다. 우리 선조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사농공상으로 직업이 정해져 있었다. 태어난 후에도 쓰고 있는 갓의 크기라던가 겉옷의 모양, 심지어는 치마꼬리를 여미는 방향으로 신분을 과시 내지 차별했다.
우리나라는 갑오개혁 이후에 신분제가 철폐됐지만, 아직도 인도의 일부 지방에는 카스트인 ‘바르나’가 남아 있다고 한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팔기군이라는 군사 편제로 만주족과 이민족을 구별해서 통치했다. 단일민족인 우리에겐 그런 구별이 불필요해서였을까, 우리는 유독 비효율적인 ‘나이’에 집착한다. 그것은 모든 계급을 관통하는 무소불위의 잣대다. 말문을 겨우 연 어린아이에게 어른들이 제일 처음 던지는 질문도 “너 몇 살이냐?”다.
남편은 4남 2녀 중의 셋째였다. 미국에서 결혼한 후 남편의 형제들과 친분을 쌓을 기회가 없어 아쉬웠던 터라 남편이 사업 관계로 자주 한국을 왕래하게 되었을 때 작은 선물을 보내곤 했다. 화장품, 액세서리를 포장해서 큰형님, 작은형님, 동서 등을 써서 보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남편은 이 호칭들을 조금 혼란스러워했다. 선물 꾸러미에 해당 가정의 장조카 이름으로 구분하면 더 간단할 것 같다고 했다. 그 의견에 따라 이듬 해 한국 출장길에 누구 엄마 등으로 써 보냈는데 큰 사달이 나고 말았다. 손위 형님에게 무례하게 아무개 엄마라고 했다는 것이다. 대놓고 호칭한 것도 아니고 편의상 구별해서 썼을 뿐이고 솔직히 그들에 대해 윗사람, 아랫사람이라는 개념보다는 뭉뚱그려 친근하게 느끼는 남편의 동기들일 뿐이었다. 남편은 앞으로 선물 심부름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오래전 일이다.
남편은 형과 단짝이었다. 같은 이공계에 외모도 닮았다. 아서 코난 도일이나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 등 형이 좋아하는 책들을 귀국할 때마다 남편은 시간을 내서 챙겨갔다. 한국 이름이 병기인 남편을 형은 ‘비케이’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출장 중엔 호텔에 묵는 동생을 픽업해서 매일 한식 아침을 먹여 보냈다. 친구 같은 형제 사이에선 문제가 안 되고 동서들 간에는 엄격하게 적용되던 장유유서에는 이중의 잣대가 있었던가 보다.
지금 두 사람 머무는 곳에는 동생이 먼저 갔다. 그곳에서는 태어난 순서가 먼저일까 도착한 순서가 먼저일까. 무척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다.
대학교 졸업반 때 집에 내려 갔는데
부산에는 나가시라는 택시타기가 그때까지도 있었어요.
모르는 사람끼리 합승하는데 당연히 먼저 탄 사람이 안쪽으로 앉아야 해요.
문옆에 앉은 쪽진 새댁이 꼼짝 않길래 저쪽으로 당겨 앉으라고 했더니
도끼눈을 하고 "세사나(세상에나), 나 많은 사람보고 비키라카네"
그때 내가 23살, 솜털 보송한 새댁이 고작해야 20살?
"보소 어르신요, 몇살이신교?" 했던 생각이 납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나이를 우선 순위로 놓지 않기에
이민 초기에 많이 혼란스러웠답니다.
아직도 장유유서 문화는 벗어나기 힘들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