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일에 여권을 챙긴 이유
중앙일보 [이아침에] 11/11/2020
온 세계가 숨을 죽였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교차로에서 푸른 신호등을 기다리듯이 그 순간을 기다렸다.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결정되는 순간을.
사위는 가족들에게 여권을 챙겨 놓으라고 했다. 선거 결과에 따라 이민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손자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럼 그랜마는" 했더니 사위는 즉각 같이 간다고 했다. "그럼 메릴랜드 그랜마는"하고 또 묻자 같이 안 간다는 대답이었다. 손자가 울상을 짓자 "그 그랜마는 사랑하는 대통령과 미국에서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온 나라가 잠을 못 이루는 밤들이 몇 번 지나고 다행히 딸 가족은 여권을 쓸 일이 없을 것 같다. 나도 먼지 앉은 캐리어를 지금 내리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번 일로 시작된 사위와 안사돈의 의견 충돌은 쉽게 봉합될 것 같지 않다.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이 땅에서 살아 온 세월 동안 이번과 같은 혼란과 끝 모르는 대립의 대통령 선거는 처음 경험했다. 우리 조국의 대통령 선거에도 이 같은 관심을 쏟아 본 기억이 없다.
아무도 자기의 의견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누구도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누르기 어려운 적나라한 희망과 욕망들은 날 것 그대로인 채 불꽃 튀며 날아다녔다.
오래 전 LA 다저스와 보스턴 레드삭스가 포스트 시즌에서 만났을 때였다. 골수 다저스 팬인 나와 동부 출신인 사위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넌 적군 사이였지만 딸아이의 입장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속내를 감추던 딸은, 패색이 짙던 다저스가 상대의 1사 2루에서 타자와 주자를 병살타 처리하자 낭중지추(囊中之錐)를 어찌 숨기리오,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종종 시청하는 한인 유튜버가 있다.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과 무엇보다 생각에 무게중심이 잡혀 있어 젊은 나이임에도 고령의 팬 층도 많이 확보하고 있었다. 이번 선거 시즌이 시작되며 그는, 자신은 그 어느 쪽도 아니라고 밝혔다. 그토록 선명하게 무편 무당임을 거듭 천명하던 그는, 박빙의 어느 주의 개표 상황을 전하던 날, 아무개 후보가 ‘아쉽게도’ 역전을 당하고 말았다고 말해 말 그대로 아쉽게도 본심을 내보이고 말았다.
선거로 갈린 서로 다른 의견과 다양한 생각들이 다시 조화를 이루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잠시만이라도 붉은색과 푸른색을 구별 못 하는 색맹이 되어 보자.
이제 속내와 본심은 슬그머니 감추고 가면무도회장으로 돌아가자. 벗어 놓았던 가면을 다시 쓰고 모두 함께 일상의 춤을 추자. 파트너가 마음에 안 들어도 인내로 다음 곡을 기다리자. ‘첸지 파트너스’가 콜 아웃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