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서는 아이들

                                                                       ( 9/14/2020 중앙일보 열린 광장에 실림)

 

 

                                                                                                                 이희숙

 

 

  날씨가 뜨겁다. 폭염 주의보가 내려지고 지구가 끓는 듯하다. 화씨 110도를 넘나들며 정전 사태가 벌어진다. 에어컨까지 꺼지게 하는 비상사태를 초래한다. 바깥 놀이를 못 해 몸을 비트는 아이가 측은한 생각까지 든다. 나는 차가운 음식만 찾으며 혼자 몸도 간수하기 힘겹다. 우리네가 자초한 지구 온난화에 의한 재앙인 듯하여 마음이 아프고 언짢다.

 

  무더위 속에 아이 두 명이 동시에 입학한다. 어린아이 둘은 서로 마주 보며 운다. 새로 입학한 애를 교사가 안아 주고 달래며 땀을 흘리지만,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처음 부모를 떠나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아이가 우는 것은 정상이 아닐는지. 익숙해 있던 일상에서 벗어난 새로운 환경과 친구가 낯설 것이다. 분리되는 두려움을 울음으로 표현한다. 아이의 성격과 양육 방법에 따라 다르지만, 학교가 즐거운 곳이라고 인식되기까지 누구나 적응하는 소요 시간이 필요하다. 학교생활에 적응하며 우는 아이의 심경을 헤아리니 안쓰럽다.

 

  곁에 있던 세 살 여자아이가 우는 애의 손을 잡고 토닥토닥해주니 울음을 그친다. 선생님보다 친구의 위로가 마음에 더 닿았나 보다. 마음을 나누는 모습에 가슴이 찡하다. 그 여아는 엄청나게 울었던 아픔을 가지고 있다. 입학할 당시 공교롭게도 부모가 이혼해 엄마와 아빠 사이 양쪽 집을 오가야 했다. 엄마가 출근하면서 학교에 내려 주고 가면 저녁 퇴근 시간에 아빠가 데리러 온다. 생모와 헤어지는 슬픔 때문에 필사적으로 울었던 기억이 남아 있을 터. 자기가 겪었던 아픔을 기억하며 친구를 위로해주는 마음이 대견하지 않은가. 새로운 환경에 홀로 서는 모습은 무더위를 시원케 해 준다.

 

  시간이 약이랄까? 마침내 교사의 관심 속에서 새로 온 아이는 친구와 어울리며 즐거워하기 시작한다. 또래끼리 공감을 형성하며 사회성을 터득해 간다. 동질감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으며 스스로 헤쳐 나간다. 자아존중감, 자아 탄력성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독립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물론 부모의 양육 방법이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을 수십 년 경험을 통해 아는 바이다. 우는 딸을 떼어놓고 나도 울면서 출근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문화와 언어가 다른 민족 어린이와의 적응엔 어려움이 많을 게 분명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오렌지카운티로 이사 왔을 때 딸이 겪은 일이 떠오른다. 딸이 새로 입학한 초등학교에 한국 어린이가 없었다. 며칠 후부터 딸이 학교 앞에 도착하면 배가 아프다며 구토했다. 반복되는 난감한 증상을 해결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고, 알게 된 병명은 신경성 위장염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두려움으로 인해 병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딸은 백인 어린이 속에서 발견한 동양 아이가 있어 마음을 주었다고 했다. 의지했던 친구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학용품을 나누어 주곤 했단다. 그 애는 점점 좋은 물건을 요구했고 나중엔 원하는 것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모에게 말하지 못하고 스스로 해결도 못 한 채 신경성 위장염을 일으킨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강하게 자라길 바랐는데 마음이 아팠다. 차별과 따돌림 속에서 겪을 흔들리는 정체성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이곳에서 자라는 2세들이 부모도 모르게 스스로 이겨낸 숨겨진 이야기가 많으리라 짐작이 된다.

 

 

  불현듯 입양아가 겪었을 외로움과 슬픔이 낯설지 않다. 한국전쟁 이후 바다를 건너 많은 고아가 생의 터전을 옮겨왔다. 더욱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길 바랐지만, 정체성 방황을 극복하며 어렵게 자란 예를 보지 않는가. 입양아로서 당했던 인종차별, 따돌림과 고독 사이에서 겪었던 아픔을 누구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 프리스쿨에 모국에서 아이를 입양한 한인 학부모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같은 인종과 같은 피부색이기에 장려할 일이라 생각한다. 그 아이가 순조롭게 적응하며 훌륭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본다. 문화와 언어의 벽을 잘 넘어 슬기롭게 자라난다. 버림받았다는 미움에서 벗어나 정체성을 찾고 성장 후 친부모를 찾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기도 한다.

 

  다르게 주어진 새 환경에서 포기하지 않고 홀로 일어서는 어린이를 바라보며 내 마음 한구석에 청량한 바람을 맞는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