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지의 깊은 맛으로

 

                                                                                                                                         이희숙

 

  찬 바람이 불어오면 어머니는 월동 준비를 하셨다. 빨간 고무장갑을 낀 이웃 아주머니들이 어우러져 김장하며 음식 맛과 함께 사람의 정()을 만들어내는 큰 행사였다. 밭에서 얻은 정기를 머금고 실려 온 배추는 꽉 찬 노란 속이 쪼개 나뉘어 소금물 속으로 들어갔다. 긴 시간 후에 뻣뻣했던 배추는 팔, 다리, 몸에 힘을 다 빼고 노골노골해 졌다. 푹 삭아진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꼿꼿한 잎이 고개를 쳐들면 다시 짜디짠 소금물에 파묻혀야 하는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닌가. 부드럽게 변한 다음에야 큰 그릇에서 물로 깨끗이 씻겼다. 속마음의 더러운 티까지 씻어낸다고 할까. 절여지고 씻기어 소쿠리에 놓여 물기를 빼내는 첫 단계를 거쳤다.

 

한 편에선 무를 채 썰고 마늘을 빻아, 생강, , , 미나리, 부추를 곱게 썰었다. 육수에 젓갈을 첨가하고 빨간 고춧가루를 버무려 감칠맛을 내는 양념을 만들었다. 급기야 풀이 죽은 배추는 빨간 양념 속에서 혼연일체를 이루었다. 양념이 몸통 속 깊숙이 스며들어야 제맛이 난다는 이치가 숨겨진 것이 아닐는지. 배추가 김치로 거듭나려면 적당한 온도에서 발효될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김치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다음 단계다.

 

김장을 시작하기 며칠 전 아버지 언 화단의 땅을 삽으로 구덩이를 파고 김장독을 묻었다. 그 토기 항아리 안으로 돌돌 말린 김치가 들어가면 김장이 끝났다. 김장을 마친 어머니는 올겨울 준비가 끝났구나. 이제 풍족하게 지낼 수 있겠지.”라며 흐뭇해하셨다.

 

  1122일은 '김치의 날'이다. 캘리포니아주 의회에서 한국이 김치 종주국임을 명시하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김치는 세계적인 건강식으로 최고의 맛을 뽐낸다. 재료나 만드는 방식, 저장, 숙성 과정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이러한 김치의 변화 과정을 통해 인생의 교훈을 얻는다.

 

  배추는 김치가 되기 위해 옛 흙의 연민을 버려야 한다. 자신의 자존심은 다 내려놓고 자아와 교만의 덩어리를 소금에 녹여야 한다. 자신을 내려놓은 배추는 양념으로 버무려지며 새로운 가치관이 곁들인다. 지식과 경험을 통해 삶의 방향과 인격이 형성되는 것처럼 발효하는 과정을 통해 미생물에 의한 분해과정으로 효모균, 유산균 등 효소가 만들어진다. 이들이 면역력 증진과 천연 항생 작용을 하므로 사람에게 유익하게 바뀌는 것이다.

 

땅속의 적당한 온도 속에서 김치 맛은 아삭아삭 무르익어 간다. 이것이 겨울에 제맛을 더 풍기는 김치의 비결임에 틀림이 없다. 살얼음 속에서 묵은지의 은은한 맛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김치가 어두움 속에서 인내를 통한 값어치 있는 삶을 이루어가듯 우리 인격도 이런 숙성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특이한 맛을 지니게 될 터이니까. 자존심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분해되고 생성되어 살면 삶의 진솔한 의미를 깨우칠 것이다. 나도 추위 속에서 맛깔 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김치 같은 인생이길 바란다. 인격도 김치처럼 삭혀지며 묵은지의 깊은 맛으로 익어간다. 나도 숙성해 가야 하리라.

 

  채소가 귀한 겨울철에도 기본 양식을 만들어 보관한 선조의 지혜에 감탄한다. 요즘에는 주택의 양식이 바뀌어 땅에 묻을 수 없다. 이 이치로 만들어진 김치냉장고가 전통 김장독의 김치 숙성과 보관 원리를 현대 기술로 구현했기에. 차가운 땅속 역할을 하고 수분 증발을 막아주어 김치를 신선하게 보관한다. 아마도 한국에서 만들어낸 세계의 유일한 가전제품일 것이다. 자연의 조화를 이용한 단연 으뜸의 과학 작품이다. 나는 그 효능을 실감하며 결혼하는 딸에게 혼수품으로 준비해 주었다.

 

김치는 변함없이 입맛을 돋우는 반찬이다. 산해진미가 놓여도 그것이 빠지면 허전하다고 할까. 내 입맛을 닮았는지 손자는 일찍이 김치맛을 알았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김치찌개를 꼽는다. 어머니가 김장으로 겨울 먹거리를 준비하며 그 안에 인생을 녹여 내셨듯, 나도 손자를 위해 김치찌개를 끓인다. 묵은 김치의 맛과 의미를 전해 주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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